奥 華子의 '첫사랑'이라는 노래다. 여기에 보면 あなたは友達・今日から友達・もう二度と好きなんていわないから・これ以上に遠く行かないで・もう見るだけでかまわない라는 가사가 나온다. 뒤로는 더 절실한 부분이 있지만 여기서 적당히 자르자면, 대충 첫사랑과 헤어지고나서 이제 당신은 오늘부터 친구인데,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을테니까 더 멀리 가지 말아줘 하는 대단히 비굴한 내용이다. 오쿠 하나코는 가사가 대체로 오글거리고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가장 즐겨 듣는 일본 가수 중 한 명이지만 가사의 내용을 잘 음미해보면 대체 뭐하는 짓인지 이해해 줄 수가 없다. 사실 가사의 내용대로 실현한다면 스토커급이다. 설령 잘 해서 친구로 남아있다고 해도 좋은 친구는커녕 그냥 적당한 친구조차 되기 힘들지 않을까. 한쪽이 이렇게 열렬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는 그냥 친구라는 타이틀도 버거운 법이다.
물론 친해야만 친구인 것은 아니다. 어쩌다 어느 특정한 시공간을 함께 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친구가 되고, 부러 절교해버리지 않는 이상 친구 관계는 약해질 망정 아예 사라지지는 않는다. 길에서 기억도 안 나는 초등학교 시절 같은 반 친구를 마주쳐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고 치자. 지금 기억에서 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남남이 될 수는 없다. 이렇게 말하고 보면 대체 친구가 뭐길래 이렇게 머리 아프게 사는가 싶을 것이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친구는 대단히 제한적이다. 저 사람과 내가 정말로 친구 사이인지 조금 고민해 봐야 하는 상대가 꽤나 많을텐데, 그건 친구가 아니라는 증거다. 정말 친구라면 별 의심없이 친구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페이스북의 친구 목록을 들여다봤다. 페이스북 상에서 맺는 친구는 '친구'라는 상징만을 빌렸을 뿐 실제 친구 관계와는 하등의 연관이 없다. 오죽하면 친구 끊기가 가능한 걸 보면 이게 일반적인 의미의 친구일 수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일단은 서로가 올리는 소식을 보고 좋아요를 누르거나 댓글을 달 수 있다. 이 점이 왠지 불편하다고 생각되어 원하지 않는 상대에게는 내 글을 노출시키지 않고 그 역으로도 할 수 있는 '먼 친구' 설정을 하면서 나는 오히려 나 자신에게 큰 불편함을 느꼈다. 상대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는데 내가 그저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이 사람과의 관계를 멀리하고 있었으므로. 누군가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를 먼 친구로 등록해버렸는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걸 생각하면, 결국 인간관계에서 그런 종류의 불편함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그다지 친하지 않아도 더 친해지고 싶은 사람에게는 '먼 친구' 설정을 하지 않는 내가 기회주의자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역시 SNS는 쓰기 나름이다. 결국 인간관계를 대체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보조하는 수단이다.
인간관계에서 수단의 중요성을 경시하는 것은 아니다. 독일과 같은 개인주의 사회에서, 그것도 뮌헨과 같은 큰 도시에서는 친구를 사귀기가 힘들다. 이건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니라, 여기서 알게 된 독일인 친구도 똑같이 한 말이었다. 세미나에서 이야기를 해도 끝나고 나면 모두 인사를 하고 사라져 버린다. 이미 여러 학기째 학교를 다니고 있는 그 친구도 세미나에 가면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사실 여기서는 대체 어떻게 친구를 사귀나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러니까 무언가 정기적으로 같이 하지 않더라도 편하게 연락할 수 있는 그런 친구. 다만 이곳에서 친구 맺기의 중요한 수단은 파티와 여러가지 활동들이다. 파티에서 비록 스쳐지나가는 인연이지만 마음이 정말 잘 맞는다면 계속 연락할 가능성도 있을 것이고, 스포츠나 사회 활동 등을 같이 하다가도 개인적으로 만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생각만큼 단순한 일은 아닐 것이라는 게 문제. 같이 사는 사람들이라면 친해질 가능성이 있겠지만 과연 그걸 정말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또 별개의 문제다. 공동주거도 하나의 '활동'으로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한국에서 가족 관련 학회에 갔을 때 일인 가구들이 공동 주거하는 형태가 앞으로 새로운 가족의 모습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일종의 그런 개인주의와 공동체를 공존시키는 모델일 뿐 친구로서의 면모가 지배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건 레비나스가 타자의 윤리를 주장했듯 타자의 타자로서의 존재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인간들은 서로를 타자로도 대하지 않고 있다. 이른바 자기밖에 없는 사회다. 이는 세상과 자신을 완전히 유리시키는 고립주의나, 자신이 세상을 삼켜버리는 이기주의의 형태로 드러난다. 타자 없는 '나'는 '나'의 경계를 잃어버리게 된다. 타자를 억지로 만들어내기라도 하려면 상대의 경계 속에 뛰어드는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 이것은 오늘날과 같은 위험사회에서 더욱 어려운 일이 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와서 정말 내가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명이나 되는지 모르겠다. 얼굴 볼 일이 없어지면 자연스레 멀어지는 게 인간이지만, 친구라면 정기적인 스케줄이 없어도 만나야 하는 것이겠지. 그런 의미에서라면 내게 친구는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항상 개인적인 관계를 맺는 데에 서툴렀던 내가 아무 생각없이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는 하는 걸까. 몇 명 얼굴이 떠오르긴 하지만 그들과도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지 않게 된다면 연락하지 않게 될까? 한국에 돌아가면 친구인지 아닌지 고민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내가 친구라고 생각하는 이들과 연락해서 만나고 싶다. 이제 얼굴 볼 일도 없을 예전의 동창생은 잊어버리고. 동창생은 말 그대로 같은 창문을 내다볼 때나 유의미한 상대다. 말하자면 그들은 이미 내 기억 속에만 있는 나 자신의 또 다른 투사체일 뿐이다. 그러므로 타자를 발견하자. 그렇게 시작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