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들반들 윤나는 문고리를 밀자, 문이 무겁게 열렸다. 스프링이 강하게 들어가 있는지 힘들게 밀어낸 문은 그의 등 뒤에서 서서히 닫혔다.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시끄럽게 몇 칸 오르자 지층이었다. 한 층을 정말로 올라가야만 1층이 된다는 오래된 합리적 사고 덕분에 그는 아직도 0층에 있는 셈이었다. 층계참에서 더욱 무거운 고동색 문을 열자 비로소 지층의 방들이 연결된 조그만 홀이 나왔다.
보통 사람 키의 1.5배는 넘기고도 남는 높이의 문들이 여러 방으로 통해 있었다. 들어와서 바로 앞에 있는 방 안을 흘낏 들여다보았지만 황갈색 봉지에 담긴 빵을 뜯어서 먹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홀에 놓인 탁자에 걸터앉은 채 시계를 보았다. 11시 3분 전.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약속 시간보다 먼저 오는 사람은 없었지만 일찍 와서 손해 볼 일은 없었다. 사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는지도 몰랐다.
아까 그가 들어온 문이 다시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고개를 들고 쳐다봤지만 모르는 사람이어서 입가에 경련하듯 가벼운 미소를 지어주고 다시 숙였다. 층계참의 오른편, 즉 지금 그에게는 정면이 될 방향의 방 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중문이라 노크를 크게 해주세요, 라고 써져있는데도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올 정도면 안에서는 대폭소를 했음이 틀림없었다.
열한시가 되었지만 시간에 맞추어 등장하는 사람은 없었다. 불이 꺼진 채 아무런 기척을 보이지 않는 무대를 보는 것처럼 긴장되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정시성을 생명처럼 여긴다고 했지만 그런 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경향성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반대로 한국 사람들이 약속에 30분씩 늦는다고 해서 모두가 지각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앞에 있는 문이 열리고 안이 살짝 들여다보였다. 이중문이라더니 정말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만한 공간을 사이에 두고 문이 하나 더 있었다. 아마 방음을 위한 것이겠지만 어쩐지 으스스했다. 쾌활하게 인사를 하고 문을 두 번 닫은 남자가 층계참으로 향하는 문을 열고 나갔다. 문 위에 달린 도어클로저가 문을 서서히 밀어 닫으며 남자의 발소리도 희미해져갔다. 발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된 순간 문이 다시 열리고 E가 들어왔다.
그는 E에게 인사를 하고 시계를 봤다. 열한시 이분.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급 시계를 차고 있던 E는 지금을 몇 시라고 생각할지 문득 궁금했다. 이 분 정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기계식 시계를 갖고 있는 사람에게 오차는 항상 싸워야 할 대상이었으니 말이다. 짧은 대화 끝에 E가 알아듣기 어려운 단어를 몇 마디 섞어서 말했으므로 그저 웃어주었다. 외국에서 잘 모를 때 할 수 있는 제일 좋은 행동은 웃는 게 아니라 다시 질문하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E가 오자 어디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F도 문을 열고 등장했다. 연기하듯 과장된 톤과 큰 목소리로 인사를 하는 걸 보니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음이 편해졌다.
'구 <배설> > 심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의 피, 나의 살 (0) | 2013.12.07 |
---|---|
제목 미정 (1) (0) | 2013.12.05 |
카파도키아 헤븐 (1) | 2013.11.26 |
열역학적 소네트 (4) | 2013.11.11 |
타자성을 느끼기 위하여 (3) | 2013.1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