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피, 나의 살
그 날
내 몸은 도축되어야 했다
절망을 잊을 때까지
세심하게 분해되어
나의 육신을
바라는 생명들에게 전부 내 주고
시간을 모르는 곳에서
나도 평화로워야 했다
내 피에 섞여 흐르던
둘과 반 계절
항상 네 쪽을 향하던 그림자
너에 대한 무지에 대한 무지
유일한 질서
그러니까 모든 것
능숙한 손길에 시원했다
목덜미에 흐르는 나의
아니 너의 모든 것
거꾸로 매달린 채
기억을 뚝뚝 흘려버렸다
환희와 고통도 발끝까지
새하얗게 빠질 때까지
나를 이루던
굵은 한 토막이 사라지고
홀가분하게 앞으로
자꾸 앞으로 갔다
육체들의 마지막 광장
하나의 몸뚱아리가
제각기 호명되어 헤어지는
깨끗한 인사
나마저 희미해지고
모든 것이 잘려나가도
지상을 떠돌 우리들의 궤적
(2013.12.07.)
이렇게 저는 배설 1월호에 해당하는 글을 씁니다. 왠지 제일 한가한 사람이다보니 앉아서 이상한 글만 쓰게 되는 모양이네요. 요새 저는 유령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피가 싹 빠진 도축장의 고기들 같구나 싶어서 왜 그런가를 곰곰히 생각해봤죠. 그러다보니 생각이 이상한 데로 튀어서 육체들의 마지막 광장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다 써놓고 보니 은희경의 '유리 가가린의 푸른 별'이라는 작품이 생각나네요. 기회가 되면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대체 누가 읽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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