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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배설>

세계의 끝, 벼룩시장 세계의 끝이라고 하면 나는 예전에 본 애니메이션을 떠올린다. 세계의 끝에 있는 마녀를 찾아가서 무슨 책을 빼앗아오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배경도 중세스럽고 주인공도 도적놈인지 해적놈이었으므로 세계의 끝이 수직으로 떨어지는 바다로 묘사된 게 꽤나 자연스러웠다. 정확히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주인공은 그곳에서 일종의 차원의 문 같은 걸 통해서 마녀가 살고 있는 데로 뛰어내렸다. 하지만 거기서 만약에 계속 떨어진다면 어디로 갈까? 나는 무한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땅이 평평한 사각형이라고 상상했던 옛날 사람들만도 못한 상상력이다. 과학은 우리에게 알아야 할 것은 알려주지 않았고, 알지 않아도 좋은 것만 알려주었다. 어쨌거나 기회가 있다면 세계의 끝에서 뛰어내려보고 싶은 심정이다. 뮌헨은 대체로 아름다운 .. 더보기
#10 만일 이 모든 것이 실패한다 해도, 내게는 공립도서관이 있다 원고번호 1 작희만일 이 모든 것이 실패한다 해도, 내게는 공립도서관이 있다 몇 달 뒤면 속절없이 대졸자가 되어 버린다. 다른 학생들처럼 휴학을 할 여유도 내게는 아마 없다. 집에서는 그냥 빨리 내가 졸업하기를 바라는 눈치다. 그래도 내가 이곳에 옴으로 해서, 가계의 씀씀이가 조금은 줄었을 테니, 내가 졸업을 일단 하고 나면 가족들은 조금이라도 저축을 할 수 있게 될는지도 모르겠다.사실 모든 것이 실패하는 상상은 수도 없이 했다. 실비아 플래스처럼, 오븐에 머리를 박고 죽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안 해 본 것이 아니다. 다만 그녀는, 쓸쓸한 포스트모던의 시대 중년 여성으로서 오븐이라는 사지를 택한 것이기에, 그 방식은 이십대 초반, 곧 초중반의 나에게는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전에 모 커뮤니티에 자살하는 일.. 더보기
너의 피, 나의 살 너의 피, 나의 살 그 날내 몸은 도축되어야 했다절망을 잊을 때까지세심하게 분해되어나의 육신을바라는 생명들에게 전부 내 주고시간을 모르는 곳에서나도 평화로워야 했다 내 피에 섞여 흐르던둘과 반 계절항상 네 쪽을 향하던 그림자너에 대한 무지에 대한 무지유일한 질서그러니까 모든 것능숙한 손길에 시원했다목덜미에 흐르는 나의아니 너의 모든 것 거꾸로 매달린 채기억을 뚝뚝 흘려버렸다환희와 고통도 발끝까지새하얗게 빠질 때까지나를 이루던굵은 한 토막이 사라지고홀가분하게 앞으로자꾸 앞으로 갔다 육체들의 마지막 광장하나의 몸뚱아리가제각기 호명되어 헤어지는깨끗한 인사나마저 희미해지고모든 것이 잘려나가도지상을 떠돌 우리들의 궤적 (2013.12.07.) 이렇게 저는 배설 1월호에 해당하는 글을 씁니다. 왠지 제일 한가한 사.. 더보기
제목 미정 (1) 풀풀 일어난 먼지구름이 미니버스 뒤를 열심히 뒤따르고 있었다. 어차피 창문에 먼지가 잔뜩 끼어 있었기 때문에 밖을 내다봤자 별 의미가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버스 안에서는 라디오에서 몇 시간째 비슷한 음악이 흘러나오며 주술을 거는 것처럼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버스에 탄 유일한 외국인인 남자는 아까부터 옆자리에 앉은 현지인 아낙네의 그을린 얼굴을 흘낏거렸다. 눈을 감고는 있으나 잠들지 않은 듯, 눈가가 주기적으로 꿈틀거렸다. 비틀린 치열 사이로 보이는 어두운 공간이 괜히 불쾌해보였다. 고개를 돌리면 바로 황토색으로 칠해져 바깥과 안을 구분하는 기능만을 수행하는 창문이었다. 그렇게 열댓 명이 퍼즐 조각처럼 꼭 낀 채 몇 시간이고 달리고 있었다.몇 시간 전만 해도 남자는 호기롭게 호객꾼의 손에 돈을 .. 더보기
#9 풍선의 무덤 1 선배 한 분이, 요즘은 소설은 쓰지 않느냐고 물어셨고, 그래서 소설을 한 번 써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지인 중에 내가 쓰려고 하는 이런 종류의 소설을 아주 싫어하는 이가 하나 있는데 (굳이 외국에 배경을 둠으로써 불필요한 타자화를 실현하고 타자에 대한 환상을 풀어내는 류의 글), 그는 아마도 이 웹진을 읽지 않을 것이기에 아마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원고번호 1 작희 풍선의 무덤 1 일주일 전부터 풍선이 한두 개씩 비어 간다 싶었던 것이 오늘은 세고 또 세어도 꼭 다섯 개가 모자란다.네가 잘못 셌다고 생각해, 따냐는 말했고, 내가 사칙연산에 나쁜 것도 사실이다 싶어 풍선을 색깔별로 나누어 다시 세었다. 따냐는 손이 잰 편이라, 무지갯빛 콜리플라워 같던 풍선 다발이 그 손에 들려 삽시간에 .. 더보기
문 (1) 반들반들 윤나는 문고리를 밀자, 문이 무겁게 열렸다. 스프링이 강하게 들어가 있는지 힘들게 밀어낸 문은 그의 등 뒤에서 서서히 닫혔다.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시끄럽게 몇 칸 오르자 지층이었다. 한 층을 정말로 올라가야만 1층이 된다는 오래된 합리적 사고 덕분에 그는 아직도 0층에 있는 셈이었다. 층계참에서 더욱 무거운 고동색 문을 열자 비로소 지층의 방들이 연결된 조그만 홀이 나왔다.보통 사람 키의 1.5배는 넘기고도 남는 높이의 문들이 여러 방으로 통해 있었다. 들어와서 바로 앞에 있는 방 안을 흘낏 들여다보았지만 황갈색 봉지에 담긴 빵을 뜯어서 먹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홀에 놓인 탁자에 걸터앉은 채 시계를 보았다. 11시 3분 전.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약속 시간보다 먼저 .. 더보기
카파도키아 헤븐 밤중에 바다를 바라보면, 둥둥 떠 있는 부표가 새까만 사람 머리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어느 위치에 어떤 부표가 있는지 꿰고 있는 나는 그게 당연히 사람 머리가 아닌 줄 알면서도 사람 머리라고 생각해버렸다. 그러면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심심찮게 외지인들이 물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하곤 하지만, 그들은 운이 좋으면 퉁퉁 분 모습으로 돌아왔을 뿐 스펙터클한 광경을 연출하지는 못했다. 물 위에 사람 머리만 덩그라니 있다면 부표처럼 속이 비어있으려니 생각하면 내 머리가 텅 비어버리는 것처럼 시원한 느낌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달렸다. 아쉽게도 이제 바다는 너무 멀리 있다. 내륙에서는 비린내가 난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말이기 때문에 한 번도 입밖으로 내본 적이 없었다. 이 나라의 말로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 더보기
#8 하나 반의 고향 1 원고번호 2 작희하나 반의 고향 1 일전에 배설 필진의 모 멤버가, 너의 글에서 망명작가의 냄새가 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무슨 의중으로 말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소의 아이러니가 섞인 발화임은 분명했던 것이, 나는 망명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내가 도피자가 아닐지언정, 나는 망명 작가들의 글을 좋아한다. 영어로 피신해 오는 이국의 언어 화자들이 좋다. 그렇게 한 다리를 건넌 영어로 쓰인 글은 늘 어디론가 도망하고 있는 것만 같고, 단어와 문장으로 쌓아올린 벽을 벽돌 하나 단위로 다른 곳으로 옮겨 보면 그 모든 것은 사실 거대한 심연을 가리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는, 그런 허망한 속임수의 느낌을 준다. 같은 이유로 나는 미대 입시생들이 곧잘 그리는 공간 구성 작품을 좋아한다. 흑연 가루가 도화지의 요철을 .. 더보기
대화편 <송별> - 산문 필진 ChoHa의 입대를 기념하여 예전에 쓴 플라톤식 대화편입니다.-------------대화편 잘롭비아데스- 오 말해주시오, 덩광톤, 초하라테스가 군대르타로 떠났다는 것이 사실이오? 덩광톤- 그렇소, 당신이 론디니움으로 떠난 사이, 군대르타에서 초하라테스의 입대를 요구하는 편지가 왔었소. 우리는 초하라테스가 떠나기 전 송별회를 열어주고, 그를 보냈다오. 잘롭비아데스- 아, 아쉽구려, 그렇다면 그 송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줄 수 있겠소? 덩광톤- 물논. 우리는 모두 슬픔에 잠겼지만, 초하라테스는 그저 웃으며 우리들을 맞이했다오. 우리는 송별 장소를 저 고대네 광장 안암고라스의 저택에서 늙은이들 몇 명이서 초촐하게 열기로 하여 고테네로 걸어가고 있었소. 근데 가는 도중 문투리아를 비롯한 초하라테스의.. 더보기
리뷰 - 카운슬러 카운슬러 리뷰(약스포) 9.2/10 이 영화는 결코 기존의 '그냥 스릴러'가 아니다. 무슨 말이냐면, 주인공이 과연 어떻게 될까에 대한 서스펜스를 즐기는 기존의 문법을 그대로 따라가는 고분고분한 영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감독과 각본을 고려해본다면) 주인공과 조연들은 일단 죽거나 비참한 결말을 맞이하게 되어있다. 그것은 정해진 결말이다. 그러니깐 이건 '스릴러'보다는 '호러'에 가까운 장르이다. 이 마약 카르텔은 그 자체가 하나의 조직화된 '안톤 쉬거'(코맥 맥카시의 노인의 위한 나라는 없다에 나오는 킬러)이며, 러브크래프트적인 코스믹 호러이다. 명시적으로 우주적인 존재는 아니지만, 어두운 세계를 지배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태연하게 살인을 저지르고 스너프 필름을 만드는 이들의 모습은 코스믹 호러가 자극..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