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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배설>/JHALOFF

작가단장 1.도스토예프스키 (1)

말하라, 작가들이여

-그냥 개인적인 작가-단장이다. 중얼거림이므로 당연히 작품들에 대한 스포들도 많다.

 

1. 도스토예프스키

 

    언제나 도스토예프스키는 나의 마음속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로 자리 잡을 것이다. 이는 그가 가장 위대한 문학적 업적을 남겨서도 아니고, 그가 가장 아름다운 작품을 남겨서도 아니다.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다. 그는 문학에서의 나의 첫사랑이었으며, 첫사랑은 언제나 특별하다. 그것은 미화되고, 세뇌된다.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내가 거의 처음으로 완독한 고전이었으며, 도스토예프스키는 내가 처음으로 반하여 직접 찾아서 읽기 시작한 작가다.

    물론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와 그의 작품들을 사랑하지만, 이것은 애증관계에 가깝다. 나는 그의 모든 작품을 사랑하지는 않으며 때때로 수준 미달의 몇몇 작품들은 증오한다.

    누군가에게 도스토예프스키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작품들을 추천해달란 부탁을 받으면, 난 망설이지 않고, <지하로부터의 수기>, <죄와 벌>, <백치>, <악령>, 그리고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다섯 작품을 추천할 것이고, 거기에다가 추가로 <미성년>까지만 읽으라고 할 것이다.

    나머지는 필요 없다. 그의 초기작에서 중요한 것은 <악어> 등의 기괴한 단편 정도뿐이다. 새로운 고골을 예견한 데뷔작조차 불태워도 무방하다.

 

<지하로부터의 수기>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그의 작품 세계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작품이다. 물론 소설의 완성도는 그의 후기 비극들에 비하면 떨어지지만, 적어도 위대한 작가의 씨앗이 담긴 그런 소설이다.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 중에서 제일 처음 읽든, 나중에 읽든 어느 쪽이든 매우 독특한 작품이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실패한 어떤 지하인을 만난다. 이는 매우 특이한 경우다. 이후의 장편들에서도 지하인들은 나오지만,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바닥을 드러내는 지하인은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유일하다. 이는 어쩌면,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지하인의 관점에서 쓰였기에 그런지도 모른다. (<미성년>의 경우는 다르므로 추후에 자세히 설명하겠다.) 지하인은 모든 지하인들 중에서도 가장 인간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의 과거, 2부에서 보여 지는 그의 모습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이는 결코 긍정적인 표현이 아니다. 그는 시샘하고, 질투하며 열등감을 느끼는 지극히 평범한 한 인간이다. 그리고 그는 구원을 원한다. 그리고 그 구원은 실패로 끝난다. 나락으로 떨어졌기에, 마침내 지하인은 지하로 들어가게 되고, 1부의 지하인으로 변모한다. 그는 인간에서 관념으로 추락해버렸다. 그는 악한 인간이자 추악한 인간이 아니다. 지하조차 아니다. 지하관념에 불과하다. 그는 인간일 수도 없게 되어버린 실패자다. 그리고 후에 나오는 모든 지하인들은 인간이 아닌, 관념의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다.

 

<죄와 벌>

 

    젊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야심차게 뻬쩨르부르크 연대기를 준비했었지만, 그의 <분신>은 실패로 끝나버렸다. 그것은 어떤 면으로나 총체적인 실패작이다. 유일하게 위안을 삼을만한 점은 적어도 분신의 모티브 자체는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는 이러한 분신의 모티브를 보여주는 관념이자, 꽤나 독특한 주인공이다. 그에게는 적어도 두 명 이상의 분신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루쥔이고, 또 하나는 스비드리가일로프다.

    루쥔은 어쩌면, 다른 방향으로 뒤틀린 로쟈일지도 모른다. 로쟈가 어떤 숭고한 이상을 선택한 배고픈 소크라테스라면, 루쥔은 빵을 선택한 배부른 돼지다. 둘은 본질적으로 같으면서도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그렇기에 서로를 혐오한다.

    스비드리가일로프의 경우는 매우 특이한데, 그는 로쟈의 분신이라기보단, 하나의 미래다. 만약 로쟈에게 소냐란 존재가 없었다면, 그 또한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되었을 것이다.

    로쟈는 결코 자살하지 않는다. 적어도 <죄와 벌>에서의 로쟈는 그럴 수 없다. 그는 스스로를 비범인이라고 믿고, 그렇기에 그 자부심으로 생을 이어간다. 그가 스스로의 바닥을 들여다보는 순간은 곧 감옥이며, 거기서 그는 허무주의자로 변모한다. 이제 그에겐 범인도 비범인도 다 필요 없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에게 모든 것은 의미가 없기에,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여 진다. 그러나 그조차 그에게는 무의미한 일이다. 그리고 이 로쟈는 스비드리가일로프라는 가면을 쓰게 된다.

    스비드리가일로프는 허무주의자이기에 마지막 구원의 시도로 두냐를 갈구한다. 실패는 곧 그의 죽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 죽음마저도 별다른 의미는 없다.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미국으로 가든, 저승으로 가든, 그에게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저 조금 빨리 지름길을 선택했다. 만약 두냐가 스비드리가일로프를 선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모른다. 그저 약간의 구원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허무주의자는 허무주의자다. 모든 것에 의미는 없고, 그렇기에 모든 것은 허용된다. 두냐가 늙으면, 그녀는 스비드리가일로프에게 최후를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라스콜리니코프의 구원은 다소 비틀렸다. 그에게는 소냐가 있다. 그렇기에 로쟈는 감옥에서 마침내 회개를 하였고, 스스로를 인정하며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이 과정은 불안정하다. 소냐는 분명 작품 내에서 로쟈의 구원이 될 만한 씨앗처럼 보이지만, 그 씨앗은 로쟈가 자수하는 순간까지도 결실을 맺지 못한다. 자수를 하는 로쟈는 대지에 키스를 하지만, 결코 회개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비범인 사상에 얽매여있으며, 그저 스스로 한 마리 이임을 증명했다는 수치심 때문에 자수를 한다. 이런 로쟈의 변신은 짤막한 에필로그에서 급작스럽게 이루어지고, 단순히 그걸로 끝이다. 작가는 새롭게 변모한 자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를 중단했다.

    어떤 면에선 로쟈의 구원은 작품의 총체적인 실패다. 로쟈는 패배했어야하지만, 오히려 그는 구원 받았다. 비극은 희극으로 끝나버렸다. 우리는 다른 방식을 시도해야한다. <죄와 벌>을 걸작으로 남기기 위해선 다른 시도가 필요하다.

    색다른 해석을 해보자. 로쟈와 소냐의 비교다. 이 둘은 대조적인 인물이다. 로쟈는 이성의 인물이며, 소냐는 감성의 인물이다. 로쟈는 대심문관이자 지하인이라면, 소냐는 예수이자 마돈나다. 하지만 이런 대조적인 인물이 사실은 같은 인물이란 가정을 해보자. , 소냐 또한 사실은 지하인적 인물이란 가정이다. 물론 로쟈와 소냐의 다른 점이 있다면, 로쟈는 스스로가 한 마리 벌레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살인을 저질러 자신의 구원을 시도하고, 소냐는 스스로가 벌레임을 인정하고, 몸을 팔아, 희생으로서 타인의 구원을 시도한다는 점이다. 로쟈는 소냐에 대해 일종의 연민적 혐오감을 품는다. 비참한 소냐의 처지에 분노하고, 저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에 혐오를 느낀다. 이는 당연한 평가다. 왜냐하면 소냐의 모습은 로쟈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이니까. 분명 로쟈는 한때 소냐였다. 그는 스스로를 희생해서 남을 구원하기도 하는 자였다. 로쟈는 소냐의 모습에서 지금의 지하인으로 변모하고, 나폴레옹으로서의 변신을 시도한다. 그리고 실패한다. 그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의 옛 모습에게서 구원을 얻고, 새로운 모습을 갖는다.

    <죄와 벌>은 결국 자기 자신을 구원하려는 한 마리 벌레의 발버둥과 구원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벌레라는 어감이 부정적이지만 이는 당연하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관점에서 구원을 얻지 못한 우리 모두는 벌레와 같은 죄인이다. 대지는 죄로 가득 찬 불의의 세계이며, 구원은 우리를 인간으로 바꾸고, 천상으로 입성시킬 수 있는 길이다. (대지 자체에 대한 지옥의 비유는 까라마조프에서 다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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