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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배설>/JHALOFF

연옥 - 단막극

연옥 - 단막극

:W.B. 예이츠의 <연옥 Purgatory>에 대한 변주

<구원 없는 희망을 준다는 점에서 연옥은 지옥보다 지옥이다.> by. 헥토르 이온

 

무대는 서커스 천막 안의 텅 빈 모습을 형상한다. 침대에는 곧 죽을 노인이 반쯤 상채를 일으킨 상태로 경직된 채 누워있고, 그의 바로 앞에는 그의 아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있다. 중요한 점은 아들은 관객들에게 오직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등만을 보여주어야 하며, 노인의 대사가 이어지는 동안 어떠한 움직임도 보여서는 안 된다.

 

노인: 이제는 나도 갈 때가 되었구나. 이제는 너와 이별을 해야겠어.

 

아들: (침묵)

 

노인: 너는 말이 없구나. 슬픈거냐, 아니면 나에 대한 증오 때문인거냐.

 

아들: (침묵)

 

노인: (한숨을 쉬며) 그런 건 지금 이 자리에서야 다 소용없는 일이겠지. 그저 너에게는 미안하다고 밖에 할 말이 없구나.

 

아들: (침묵)

 

노인: (기침을 하며) 알다시피 나는 한 때 잘 나가던 단장이었다, 여러 광대들과 단원들을 데리고 이곳저곳을 방랑하며 부와 명성을 쌓았다. 그리고 너의 어미를 만나 결혼을 하고 너를 낳았다.

 

아들: (침묵)

 

노인: 생각해보면 그때부터였어, 네가 태어나고 나서 몰락이 시작되었다. 하나둘씩 사람들이 떠나고, 마침내 나와 너, 그리고 네 어미만 남았단다.

 

아들: (침묵)

노인: 너는 항상 너의 어미에 대해 물었지. 너는 한 번도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지. 그건 당연하단다. 나도 너에게 한 번도 나의 아내이자 너의 어머니였던 여자에 대해 말한 적이 없지. 이제 죽음을 앞둔 자리에서 나는 진실을 고백할 수밖에 없단다.

 

아들: (침묵)

 

노인: 너의 어미는 나와 너를 내버려두고 도망가려고 했어. 더 이상 버티지 못했던 것이지. 그래, 내가 결국 너의 어미를 죽였단다. 나의 손으로 말이야. 그년의 눈깔에 칼을 꽂아두고, 시체를 아가였던 너의 옆에 방치해두었지. 아가였던 너는 종종 썩어가는 너의 어미 품속에서 잠들곤 하였지. 홀아비가 되어버린 내가 어떻게 아기를 키울 수는 없었으니까. 결국 그년이 완전히 뼈만 남았을 때는 땅을 파서 뼈를 묻고는 너와 함께 그곳을 떠났단다. 그리고 네가 클 때까지 여러 곳을 방랑했지만, 그 장소는 한 번도 지나간 적이 없었지. 사실은 기억도 나지 않는단다. 어쩌면 너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몇 번이고 지나쳤을지도 모르지.

 

아들: (침묵)

 

노인: 표정이 안 좋구나. 그래, 나는 살인자였다. 하지만 도저히 그년을 용서할 수 없었다. 언제나 나는 죽음을 가장 무서워했단다. 내가 서커스로 명성을 쌓은 이유도 내 명성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예술은 영원 하다란 말이 있잖니? 하지만 그것을 결국 네 어미가 망치고 말았어. 네 어미가 도망가려고 하지만 않았어도 나는 다시 명성을 찾을 수 있었을 거야. 하지만 그년을 죽여 버리고 난 후는 그저 너와 내가 먹고 살기 위한 광대놀음 밖에 할 수 없었지.

 

아들: (침묵)

 

노인: 너는 언제나 서커스를 싫어했지. 광대놀음도 싫어했고 말이야. 너도 네 어미와 비슷했어. 결국 그만두고 너의 길을 찾겠다고 나에게 말했었지.

 

아들: (침묵)

 

노인: 생각해보면 전부 부질없는 짓이었다. 어찌되었든 나는 이제 죽을거고, 내가 이루었던 것들은 모두 소용없게 되었지.

 

아들: (침묵)

 

노인: 아니다, 아직 나에게는 나의 핏줄인 네가 남아있다. 이제 너는 자유다. 내가 죽고 나면, 시신은 내버려두고, 너의 길을 찾아 떠나거라. 네가 살아있는 한, 그리고 나의 손자, 손자의 손자가 계속 태어나는 이상, 나는 불멸을 이룰 것이다.

 

아들: (침묵)

 

노인: 모두 너의 뜻대로 이루어져라.

 

(노인, 크게 숨을 쉬고는, 평온하게 잠을 자듯 숨을 거둔다. 아들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는다. 잠깐의 시간을 두고, 무대 위에 침묵이 흐른다. 그리고 두 명의 여행자가 등장하여, 천막 안으로 들어온다.)

 

여행자 1: (주위를 살피며) 이 서커스 천막의 주인이었나 봐, 노인이군. 숨을 거둔지 얼마 안 된 것 같아. 아직도 행복하게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군.

 

여행자 2: (아들을 살피며) 이봐, 여기도 시체가 있어.

 

(여행자 2, 아들의 몸을 관객을 향해 돌린다. 그리고 아들의 고개를 손으로 들어 얼굴을 관객을 향해 보여준다. 아들의 오른쪽 눈에는 칼이 박혀있고, 고통스런 표정으로 죽어있다. 이미 반은 썩어, 왼쪽 눈은 구멍만이 남았으며, 전체적으로 해골에 가깝다.)

 

여행자 1: 벌써 썩기 시작했잖아.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나봐.

 

여행자 2: 누구였을까? 그리고 누가 죽인걸까?

 

여행자 1: 글쎄, 이 노인은 알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시체를 눈앞에 두고 죽은 거치고는 굉장히 평온한 죽음이군. 마치 행복한 꿈을 꾸고 있는 사람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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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이츠의 희곡 <연옥>을 처음 읽었을 때 생각난 변주-극이다. 물론 실제 원작에서 두-세가지 요소를 가져왔다는 점을 빼면, 다른 희곡이지만, 역시나 예이츠에게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이별'에 관한 꽤나 긴 단막극을 쓰고 있었지만, 시간과 스트레스로 또다른 이별에 관한 소재를 대신 쓴다.

원래 이 소재는 콩트 형식으로 구상하였으나, 예이츠의 희곡에 대한 경의와 희곡  자체가 좀 더 표현하기 좋을거 같아서 짧은 막간극으로 형식을 바꾸었다.


물론 크게 달라진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