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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글의 자리(Side B)

배설을 너무 오래

지연하였기 때문에 배설하고자 한다.


그때 우리가 꾼 꿈은 무엇의 꿈이었을까? 꿈이란 어떤 식으로 정의할 수 있는 세계란 말인가. 꿈이란 형식만 정해져 있고, 내용은 변화무쌍하다. 순간적으로 고정해서 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어떠어떠한 꿈을 가졌다고 말할 때 그것은 꿈의 사진을 찍은 것과 같다. 실제 꿈이 가지고 있는 내용은 그 순간에 변화하고 있다.


배설을 통해 우리는 일단 쓰고자 했다.

지면이 필요했다는 말이다. 개인 블로그여서는 안 되는 거였나. 그나마 쓸만한 티스토리 블로그는 연결성이 낮은 까닭에 개인 블로그로는 고독했을 것이다. 대화가 안 되면 대화의 시도라도 되어야 하는데 개인 블로그는 독백이고 잘해야 방백이다. 익명의 독자도 좋지만,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의 글을 읽어준다는 것이 필수적이었기에 이런 제도를 구축한 게 아닐까.


본래 우리는 함께 쓰고자 했다.

공동의 주제 의식을 찾아 각자의 방식대로 탐구하는 과정은, 그러나 실패로 돌아갔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 추측해보면 대화는 원하되 각자 개성이 너무도 짙은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리라. 주제에도, 시기에도 얽매이지 않는 각자의 호흡, 각자의 주기를 가지고 배설하는 것이 우리에겐 최선이었다.


지금 배설은 다시 살아났다. 그런데 지금의 배설이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배설은 한 번도 죽은 적이 없는 셈이다. 내가 본 배설의 시체는 환영인가. 어떤 소망이 응축되어 환시를 가져왔나.


뒤에서는 누군가가 일정한 패턴에 따라 기침을 반복하고 있다. 무질서보다 견디기 어려운 건 질서정연한 무질서다. 순간적으로 살인의 급한 요의가 느껴진다. 마치 배설하듯이 나는 머릿속에서 살인을 저지른다. 미친 것들, 하고 상상 속의 입술이 말하는 동안 실제의 입술은 부르르 떨며 제자리에 섯!


사람을 죽이고 싶고 세상이 미운 나에게 그나마 정신의 배출구는 배설이었다. 어떻게 설명하기 어려운 폐허가 되었으나 폐허로서 새롭게 자리잡은 배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한다. 



누구도 용서하지 못하면서 용서한다고 믿으면, 그건 용서일까? 문명화된 외양을 뒤집어 쓰고 살아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몸으로 하는 일, 손으로 하는 일, 머리로 하는 일, 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추기 전에는 아마 욕구불만일 것이다. 그때까지 이 삶을 여기에 위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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