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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글의 자리(Side B)

생각하지 않고도 쓸 수 있다면

딱딱한 글을 쓰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 문장은 50자를 넘어가면 안 될 것 같고, 문단은 반드시 나뉘어야 하며, 각 문단별 소주제가 확실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규칙을 지키다보면 글은 놀라울 정도로 재미없어진다. 그것은 읽는 이가 어떠한 반전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다음에는 무슨 문장이 나올지 자연스럽게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생각만으로 살아왔던 사람들에게 생각을 벗어난 세계의 논리는 어렵다. 그 세계에는 생각으로 해결가능한 논리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조직된 논리가 작동한다. 굳이 이렇게 표현하는 까닭은, 그 세계가 비록 이성적이지는 않아도 그 자체의 충분한 논리를 가지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감성의 논리, 영성의 논리. 마음과 영혼. 육신과 정신. 하늘과 땅.


영화 <베스트 오퍼>의 주인공은 위작과 진품을 감별하는 경매사다.(이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다. 영화를 보겠다면 이 글을 그냥 읽지 마시길. 물론 이 글을 읽어도 영화 내용을 다 알아버리는 건 아니다.) 그는 평생 여자와는 담을 쌓고 살아온 이성애자 남성이며, 결벽증을 지녀 항상 장갑을 끼고 다닌다. 흔히 예술은 마치 생각을 뛰어넘는 차원에 있다고 믿겠지만, 아마 이 남자에게 예술은 차라리 오늘날의 '과학'에 가까운 시각으로 파악해야 할 대상이다. 예술을 예술로 향유하는 사람들이 예술을 통하여 주체가 된다면, 위작을 판별하고 최고가(best offer)로 파는 데에 집중하는 경매사에게 예술은 객체다. 


"위작 속에도 무언가 진짜가 숨어있다"는 것이 그의 평소 지론이다. 위작 작가들이 아무리 명화를 흉내내어 봐도 자신만의 마음을 남기고 싶어서 쉽게 찾기 힘든 흔적을 남긴다는 말이다. 위작과 진짜 사이에서 위작 쪽에 손을 들어준다면, 아무리 진짜 같이 보이는 점이 있더라도 위작임을 명심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진짜 편을 든다면, 아무리 위작이라고 해도 진짜는 숨겨져 있기 마련이라는 말이 된다. 그가 쑥맥인 사랑에 대해서도 이 잣대를 들이대며 진짜를 찾아내려 애쓰면서 어처구니 없는 결말로 향하는 건, 아마 그가 위작인 줄 알면서도 진짜만을 위해 눈을 감아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속았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가 정말 몰라서 속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 진짜의 편린을 찾아보려고 노력했으니까, 처음으로 찾아온 사랑의 낌새에 성실하고 싶었으니까 속은 거다. 그를 크게 속여 넘긴 일당에 대한 복수를 보여주기보다 끝까지 지고지순한 태도로 '일행을 기다리는' 경매사의 모습이 부각되는 건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사랑은 실패하였어도 새로운 세계의 논리와 명제를 익힌 그에게 삶은 이제야 고독해진다. 지금까지는 고독한 시간조차 몰랐을 테니까 말이다.


생각하지 않고,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고, 생각의 노예가 되지 않고, 생각으로부터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음을 꿈꾼다. 이것은 사랑의 다른 말이라는 것을, 오늘 한 영화로부터 배웠으니 이렇게 기록한다. 결국 참 많은 생각을 하며 글을 쓰긴 하였으나 결론만큼은 무지 속의 성실이 맹점 속의 사고보다는 나을 수 있다는 것으로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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