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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글의 자리(Side B)

[10분간 글쓰기] 욕망의 유예

문득 떠오른 주제를 가지고, 오직 10분만의 시간을 가지고, 그냥 이 키보드와 나 둘이서만 글을 써보기로 했다. 습관처럼 하던 페이스북, 잡념, 검색 엔진 모두 안녕. 옛날 글을 쓸 환경이 되었을 사람들에게도 방해 요소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길거리를 달리는 마차의 방울소리라든지, 유난히도 시끄러운 유모의 기침소리라든지.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유혹이 될 만한 것들이 너무도 많다. 여분이 너무 큰 나머지 본질을 침해한다. 나는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기 위해 단 10분간의 유예를 허락하기로 했다.


이것은 유예다. 내가 입고 있는 옷으로부터, 나를 둘러싼 공기로부터, XX으로부터. 결코 해방이 아닌 유예. 유예는 우유부단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얼마든 처할 수 있는 하나의 '상황'이다. 아무리 마음을 가볍게 먹은들 무거운 제약은 자유에서 自를 떼고 豫(이게 맞나?)를 갖다붙인다. 이제 나는 욕망이 원치 않은 채 유예될 수 있음을 안다.


멍한 눈동자들. 음식 사진, 여자 사진, 게임 동영상, 친구들의 이야기, 메시지들, 모든 유예된 것들이 화면 속에 그려진다. 화면을 응시하는 것은 그 평면을 어떤 식으로든 받아들이려는 노력일텐데, 입체감 없는 화면은 노력을 그대로 반사하거나 산란시켜버린다. 공공복리, 질서유지, 국가안전보장을 위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는 것들이 여기 웅크리고 앉아 있다. 목을 거북이처럼 늘인 채.


이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유예의 끝이다. 삶을 붙들고 있는 유예의 끈으로부터 풀려서, 마음껏 달려가고 싶은 것이다. 설령 바깥에서 기다리는 것이 어둠뿐인 골짜기, 쓸쓸한 부엉이 울음소리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몇 km가 되든지간에 아무 생각 없이 직진하며 걸어갈 수 있는 가능성에 희망을 건다. 


욕망은 원래 여기 있던 걸까? 유예되기 위한 욕망조차 없는 사람들은 무엇이 유예된단 말인가? 시체로부터 생명을 빼앗지 못하는 것과 같이 욕망이 없다면 아무 것도 유예당하지 않을 것이다. 가장 가난한 모습의 아파테이아. 고통스러울지라도 욕망 속에 살아가며 번민하는 모습이 더 좋게 느껴진다. 10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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