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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배설>/에이넉스

크로키 - 블루 재스민

블루 재스민 리뷰(언제나 그러하듯 스포일러 조금 함유)


'궁궐의 잔해에 초가집 세우기'


0. 세번째 보는 우디 앨런의 영화. 우디 앨런이 지금까지 찍은 영화가 너무 많고, 내가 못본게 많아서(=본게 거의 없어서) 내가 잘난척하면서 글을 쓰기가 어렵다. 누군가는 나에게 재스민이 우디 앨런적인 캐릭터라고 해주기도 했고, 또는 이 영화가 미아 패로우에 대한 뒤늦은 후회와 집착같다고 말해주기도 했다. 전자는 내가 잘 모르니깐 할말은 없고, 후자는 아마 개드립일 것이다. 



1. 평하기가 어려운 영화다. 희극일수도 있고 비극일수도 있다. 꼴 좋은 이야기일수도 있고, 꼴사나운 이야기일수도 있다. 따지고보면 '아이러니'라고 하겠다. 맨 위에서 아래를 깔아보던 누군가가 맨 밑바닥으로 떨어진 뒤의 이야기니깐. 


2. '과거를 잊고'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나는 지나온 모든 순간들의 나의 합이지 않은가. 과거를 잊는다는 것은 나를 잊는 것이다. 인간은 평생 과거에 얽매여 - 그리고 애써 얽매이지 않은 채 가장하며 - 살아갈 존재일 뿐이다. 


3. 남자는 허세, 여자는 허영이라고 했던가. 결국 재스민을 파멸시키는 것은 허영이다. 죄와 벌의 까쩨리나가 그렇게 미쳐버렸듯. 결국 믿어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이다. 박제된 채 기억의 박물관에 보존된 지난 어느 순간의 내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나. 


4. 성공담도 아니고, 복수극도 아니고, 로맨스도 아니고. 영화를 재미있게 만들만한 요소는 대부분 쳐내고도 여전히 재미있는 것이 이 영화의 매력이다. 


5. 케이트 윈슬렛의 여전한 우아함과 이젠 막을 수 없는 노화가 적절한 균형을 잡아줘서 영화가 더 멋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