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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글의 자리(Side B)

[짧은 글] 삶 편향

우리의 이야기에는 삶에 대한 편향이 있다. 불가피한 경사(傾斜)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살아있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도 이미 삶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산 자들이 이야기하는 죽음과, 죽은 자들이 이야기하는 죽음은 다를 수밖에 없다.


얼마 전 대중에게도 잘 알려져버린 작가 한강의 최근작 <소년이 온다>는 삶에 대한 편향을 벗어버린 글이었다. 살아있는 자만이, 아니면 유령처럼 준-살아있는 존재만이 발화하고 행동하고 서사를 이끌어나가는 대신에 죽은 자를 적극적으로 포섭했다.


영화 <경주>도 그러했다. '경주'는 무덤이 되어버린 도시다. (실제 대한민국 경주시에 사는 분들에게는 정말 죄송한 발언이지만, 최소한 영화 속 '경주'는 그런 곳이었으니 양해 바란다.) 그곳에서 죽음은 삶에 대한 편향을 극복하고 최소한 삶과 동등한 지위를 누린다. 얼핏 보아서는 살아있는 것인지 죽어있는 것인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낮 같은 밤이고 밤 같은 낮이 지나간다. 산 자라고 생각한 사람이 죽은 자일 수도 있기에 영화를 뚫어져라 본 사람들은 <경주>를 호러영화라고 여길 지도 모르겠다. 


죽은 자에게 발언권을 넘겨주는 것이 그렇다면 합당한 일인가. 나는 솔직히 조금 무섭다. 죽은 사람들의 눈으로 본 세계, 그렇게 본 것을 적어낸 세계가 어떻게 보일지 자신이 없다. 나의 논리와는 판이한 논리를 감당할 용기가 없다. 그런 담대한 상상력이 내게는 결핍되어 있다.


그러나 결국 살아있는 사람의 손으로 쓰여지는 게 글이고, 살아있는 사람의 손으로 찍히는 게 영화다 보니 죽은 이들이 갑자기 전세를 역전할 리는 없다. 아마 저승에서야 죽음에 대한 편향이 일상적이겠지만, 이승에서는 당분간은 삶에 대한 편향이 유지될 것 같다. 아무리 죽은 이들의 목소리를 복권하여 일으켜 세운다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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