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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글의 자리(Side B)

영에 대하여

버스를 타고 독일 땅을 달리던 시절의 이야기다. 함부르크에서 뮌헨은 아마도 독일 국내에서는 가장 긴 버스 노선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이 된다. 직선으로 달려주면 좋겠지만 버스도 수익을 내야하기에 중간에 셀 수도 없이 많은 도시에 정차한다. 덕분에 버스 정류장만큼은 질리도록 보았다. 독일은 철도가 발달한 나라다보니 버스 터미널이 잘 갖추어지지 않았다. 그냥 허허벌판에 표지판이나 몇 개 세워둔 곳들이 대부분이고, 그나마 뮌헨 같으면 대도시다보니 조금은 터미널 느낌이 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그렇지만 역시 어딜 가나 독일 도시를 연결하는 점들이 되는 건 기차 중앙역들이다. 


함부르크에서 뮌헨으로 돌아오던 날 나는 대낮에 버스를 탔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침 9시 정도에 타서 밤 9시가 넘어서 도착했다. 독일의 고속도로는 일반적으로 속도 제한이 없지만 버스는 안전상의 이유에서인지 시속 80km 정도를 유지하는 모양이었다. 길은 너무나도 잘 닦여 있고 또 워낙 산이 없는 나라다보니 버스는 끝도 없이 굴러갔다. 스쳐가는 마을마다 교회의 탑이 하나씩은 보였고 가끔씩 야트막한 언덕 같은 산들이 보이면 눈요기가 되었다. 그 정도로 아무 것도 없었다. 몇 킬로미터에 걸쳐서 유채꽃이 심겨진 밭 사이로 난 길을 달리기도 했다. 관상용이 아니라 유채꽃 기름을 짜기 위해 심었을 것이었다. 한국 같으면 휴게소 들르는 재미라도 있으련만 독일에는 그런 게 있기는 해도 주유소에 슈퍼마켓 하나 있는 형국이었다. 말이 길었는데, 종합해서 말하자면 지겨워 죽는 줄 알았다.


장거리 버스 여행을 처음 해 본 것도 아니었다. 아프리카에서도 아무 것도 없는 거나 다름없는 길을 하루 종일 달린 적이 있었다. 심지어 그땐 버스가 더 비좁고 길은 포장 상태가 열악했으며 모래 먼지가 끊임없이 들이닥쳤다. 그 와중에 너무나도 잠이 잘 온 것은 미스터리였다. 옆 친구는 내가 자면서 계속 머리를 부딪히는 바람에 한 숨도 못 잤다고 불평하긴 했지만 나는 혼미하게 가끔씩 정신이 들었다가 다시 눈을 감고서 잠들곤 했다. 오히려 그럴 수 있었던 까닭은 상황이 정말 고통스럽기 때문이었다. 깨어서 있기에는 불편해서 도저히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얕지만 빠져나오기 힘든 늪같은 잠 속에 머무를 수 있었다. 반면에 독일에서는 버스가 지나치게 안락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좌석이 그다지 넓은 편은 아니었지만 쾌적하고 차체는 흔들릴 줄을 몰랐다. 아마도 그 평안함이 나를 계속해서 현실 세계에 붙잡아두고 괴롭힌 것이 아니었을까. 


즉각적인 편리는 매혹적이지만, 편리 속에 갇혀서 내릴 수도 없는 채로 권태의 고통을 느끼게 하는 것이 그 본질이다. 베버가 말한 철로 만든 우리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련됨, 익숙함, 안정됨, 편리함을 제공받는 순간 우리는 체계적인 부자유 속으로 전락해 들어간다. 루만이 정말 대단한 건 체계 이론을 담담한 태도로 이야기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개별적인 인간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 사회에는 오로지 시스템들만이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수십 년 동안 말할 수 있는 용기에서 선지자의 풍모가 보인다. 루만은 우리들 중에 가장 뛰어난 자다. 근대인들 가운데 가장 근대인이었던 사람. 


허나 여기서 끝난다면 너무 아쉽지 않겠는가, 내게는 이런 말을 속삭이는 존재가 있다. 그는 체계가 모든 것을 뒤덮은 시대에 살고 있지만 끝까지 체계가 정복할 수 없는 부분에서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 바로 영(靈;spirit;Geist)이다. 컴퓨터는 마음을 흉내내고 있고 영혼의 근원을 뇌에서 찾는 동안에도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영에 의해 벌어지고 있다. 인간은 초월적인 데서 출발하였으니 다시 초월적인 데로 돌아갈 것이다. 체계든 실천이든 결국 중간적 형상에 불과하다. 영은 가장 개인적이고 내밀하면서도 모두가 갖고 있기에 보편적이고 원형적이다. 근대를 따분하다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언젠가 근대를 넘어설 무언가를 다시 찾아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다시 중세로 돌아가자. 중세에서 새로운 근대를 찾자. 이것이 영을 통한 새로운 계몽의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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