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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글의 자리(Side B)

새롭고 영원한 계약

한때는 기억을 고등정신작용의 일환이라고 믿었고, 어느 시절인가에는 손으로 쓰여지는 것들만이 올바른 기억이라고 주장했고, 또 보이지 않는 사회적 힘들이 그리는 지형도가 기억이라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과거의 나와 결별하려고 할 수록 그 반동으로 인해 자꾸 이전으로 회귀하는 것 같다. 요새는 점점 힘이 부친다. 그래도 힘을 내어 다시 한 번 부정해보자면 기억은 피로 쓰이는 것이다.


유혈 혁명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나도 편리하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그런 이야기는 대체로 담대한 이들에게만 허락되는 법이다. 내가 여기서 하고 싶은 말은 기억에 대한 소박한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망각의 장소를 찾아가고 싶은 사람의 도피적인 언설에 불과하다.


기억이 어디에 축적되는지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았지만 신체라는 뻔한 답은 꺼내지 않도록 하자. 아니, 그 전에 나의 경우 기억을 쌓는다는 말 자체가 들어맞지 않는다. 나는 아무런 기억도 담고 있지 않다. 내 기억이 빚지고 있는 대상은 바로 내 삶이 자리잡았던 공간들이다. 임대인치고는 아주 상냥해서 어떠한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 공간들이 내게 바라는 것이 단 하나 있다면 바로 피다. 내가 기억을 공간에 조금씩 박아넣을 적마다 그에 상당하는 양의 피가 흩뿌려진다. 거리를 걷다보면 고통스러울 정도로 얼룩진 곳이 있어 기억에 시동이 걸린다. 출구 없는 과거가 재생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핏자국이 보이면 나는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린다. 


이러한 기억의 비극은 어떻게 해도 망각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기억의  행사권이 나를 벗어나 있는 한 내가 그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은 피와 나 사이의 연결고리를 끊어내는 것뿐이다. 새로운 피의 계약을 맺을 때마다 나는 조금씩 가벼워진다. 새로이 수혈된 피에서는 달콤한 냄새가 난다. 그 냄새를 맡으며 나는 완전한 망각을 꿈꾼다. 이제는 함부로 흔적을 남기지 않기로 다짐하지만, 습관을 고치는 데는 여전히 많은 피가 필요한 모양이다. 그래도 기억이 나를 잊어주고 있으니 나도 마음놓고 기억을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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