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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배설>/healingpen

잠시 방문한 백척간두

그러니까, 또 한없이 게을러지고 있었다.

저 밑바닥까지 퍼져 눌어붙어있는 나를 억지로 끌어세워 일에 박아 넣었더니, 오늘 잠시 숨돌린 사이에 튕겨져 나가 또 바닥에 붙어버린 셈이다.

순식간에 내일을 바라보고있던 일정과 어제 끝냈어야 할 일들까지 다 날아가버렸다.

나는 이제 요령이 늘어서 금방 포기하고 다른 일을 하는 계획을 세워버렸다.

집에 돌아오니 다 떨쳐버리려는 나에게 그 일을 엄마가 손에 쥐어주었다.

나는 잡지 않겠다고 몸부림치면서 다시 한번 못내 엄마를 원망했던 것같다.

내가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미리 쳐내겠다고 했는데, 그 때도 무작정 하라고 하더니 또 다시 뭐든 해보라고 하는게 너무 버겁고 무작정 미워서.

그리고 그 짧은 사이에 또 한번, 내 삶의 방식과 엄마가 믿고 있는 방식, 그 사이의 간격과 닮음, 따르고자 하는 마음과 버리고자하는 마음, 그 마음에 대한 확신과 회의들이 한데 뒤섞여 잔뜩 부풀어 올랐다.

왜냐면 나 자신도 나 자신을 확신하고 있는게 아니었으니까.

이렇게 그럴싸한 말들로 포장하고 있지만 그냥 게으른 대학생의 게으른 최후일뿐이니까

근데 나는 못내 그렇게 추악해지는게 싫어서 다시 한번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해보겠다는 말과 함께 자리에 앉기는 했는데, 역시나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다만, 하기 싫다는 도망가겠다는 마음을 정말 조금만 접어보고, '해본다'는 행위 안에 들어가니 그 모든 결들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시도해보긴 했지만 여전히 '의지의 차이' 덕분인지 아마 이 과목은 내일까지 영영 끝나지 못할 것이다.

게으름을 부릴수록 압박은 커지고, 압박이 커질수록 잘해야한다는 생각이 커지고, 그렇게 되고나면 내 안의 완벽주의는 기승을 부리면서 거대해져 나는 다 손놓아버리고 다시 한없이 게을러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리멸렬하게 끌어온 그 악순환의 고리는 무 자르듯 끊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마 나는 끝끝내 손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다만 조용히 잠시 어딘가 위로 올라온 기분이다.

-엄마는 늘 끝까지 최선을 다해보아야 한다고 했고, 사실 내가 누구보다도 그 가치와 어떤 숭고함을 알고 있기에 그 무게에 깔린 것같으면서도 그 무게감 자체가 핑계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 맞기를 바라면서 아니기를 바라면서 맞기를 바라고, 완전히 내던져 기대고 싶어하면서 그것이 그져 내 뜻대로였으면 일뿐이라는 걸 알고, 당황하면서, 위안하면서, 역겨워하면서, 달래면서, 혐오하면서, 슬퍼하면서-

2차원의 눈으로 보면 말도 안되게 뒤섞이고 헤매일 수밖에 없는 프랙탈을 멍하니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그 무늬들을 읽어내고자 한다. 이 정교한 무늬들은 너무나 복잡한 나머지 끊임없이 흐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나는 아마 읽어낸 듯하면서 계속 놓칠 것이다. 그리고 내일 아침이 밝아오면 나는 그 윗자락에서 다시 2차원으로 곤두박질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위태로운 3차원의 백척간두를 밟은 순간만큼은, 평화롭구나.

 

그저 이 순간을 알게된 것만으로도 감사해야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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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기간의 사소한 일들이 모여 나를 돌아보게 하는건 어떤 식으로든 묘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