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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배설>/작희

#1 기억과 영원회귀

원고번호 2
작희

기억과 영원회귀

"Einmal ist keinmal, 이라고 토마스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 독일어 격언은, 딱 한 번 일어나는 일은 아예 일어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목숨이 단 하나라면 아예 살지 않아도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


(다른 이야기이지만, 나는 이 쿤데라 소설 제목 번역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Bear이라는 동사는 감당하다, 라는 뜻이 있고, 감당한다는 것은 모종의 짊어짐을 암시하지요. '참는다'는 말은 타인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는 반면, 짊어짐, 그리고 본인이 부담할 수 있는 무게라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알 수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마치 아틀라스가 짊어진 지구의 무게를, 아틀라스 본인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은 유명한 소설이고, 따라서 읽어 본 사람이 (적어도 첫 챕터만이라도)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엇이 그렇게도 감당할 수 없이 가벼운 걸까요? 인간 존재입니다. 왜 존재는 가벼울까요? 니체의 반사실적인 영원회귀에 대한 제안과는 달리, 인간의 삶은 회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프랑스 혁명이 무한히 반복하여 일어난다면 프랑스 역사학자들은 로베스피에르를 그렇게 자랑스러워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무엇에 대해 다루기 때문에, 피비린내 나는 혁명의 세월은 다양한 말과 이론과 토론들로 변하여 깃털보다도 가벼워졌고, 그 누구도 위협할 수 없게 되었다. 역사 속에서 딱 한 번 존재했던 로베스피에르와, 영원히 몇 번이고 돌아와 프랑스인들을 참수하는 로베스피에르 사이에는 무한한 차이가 있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쿤데라의 예를 조금 더 공감이 가도록 바꾸어 본다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적어도 젊은 세대 사이에서 육이오는 깃털보다도 가벼운 그 무엇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무서움을 일깨우기 위해 해마다 육이오 기념일을 돌아오게 한다 해도, 그 생생한 끔찍함은 살아오지 않습니다. 전쟁이 단지 세 개의 숫자와 역사 교과서 속의 그 무엇으로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설사 다른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그 전쟁은 육이오가 아니고, 그러므로 육이오는, 쿤데라에 따르면, 이미 감당할 수 없이 가벼워져 버린 것입니다.)

소설의 첫 장을 읽은 사람이라면, 쿤데라는 이러한 현상의 일회성에 대하여 다소 부정적인 시작을 취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한 번만 일어나고 말 일은 아예 일어나지 않아도 좋은 것이니까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삶이 단 한 번뿐이라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소위 말하는 YOLO (you only live once)--말하자면 카르페 디엠의 디지털세대 버전인데--의 만트라 하에 모든 얼간이짓과 모험이 마법처럼 용서될 여지가 생겨나니 말입니다. 쿤데라는 카르페 디엠에 의한 무한 사면에 glorious and splendid라는 라벨을 붙입니다. 개선장군에게나 어울릴 법한 라벨입니다만, 다시 말해 YOLO란 인간승리 그 자체와도 동일시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전에, '우연에 의한 만남 (unlikely romantic encouter)'이라는 주제로 다음과 같은 짧은 노트를 끄적거린 일이 있습니다.

친구인지 좋아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는 것보다 더 무서운 건 좋아하는 사람인지 그냥 아무것도 아닌지 사이의 고민이다. 적어도 전자는 생활에서 두 사람 사이의 접점이 뭔가 많을 경우일 텐데, 후자는 정말 미분의 범위를 넘나드는 미세한 접점 하나--미적분에서 내가 배운 게 딱 하나 있다면 세상엔 단독으로는 넓이와 부피가 제로인 것들이 아주 많이 존대한다는 것인데--로 위태위태하게 버티는 것이고, 그 접점이 분해되었을 경우에는 다시는 영영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쿤데라에 따르면, 이런 접점과도 같은 일회성 관계야말로--또는, 한 사람이 즐길 수 있는 무수한 '원나잇'의 만남들이--YOLO의 표상입니다. 단 한 번 사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단 한 번밖에는 다시 일어나지 않았을 그런 만남은 아예 일어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고, 따라서 한 사람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 역시 한없이 가벼워야 합니다. 그 만남이 이어지지 않고 하룻밤으로 끝난 상태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같은 침대에 같은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두 번 누울 수 없기에, 그 동침은 일어나지 않아도 큰 무리가 없었을 그 무언가일 텝니다. 일회적이고 우발적이기에 덧없고, 덧없기에 그대로 미끄러져 나가 예의 삶을 살면 그만이지요. 

하지만 사람은 아름다운 것을 붙잡고 싶어합니다. 카르페 디엠 역시 Seize the day라는 뜻의 라틴어였지요. 파우스트 역시 너무나도 아름다운 어떤 순간에게 잠시 멈추어 서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사람은 일회성에 대항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합니다.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기지요. 하지만 그 모든 가시적 기록이 쿤데라가 '깃털보다도 가볍다'고 묘사한 '다양한 말과 이론과 토론들'로 변질되고 말겠지요. 

사람의 기억이 없다면 말입니다.


Laila was lying still on the living-room couch, sweating through her blouse. Every exhaled breath burned the tip of her nose. ... Inside Laila too a battle was being waged: guilt on one side, partnered with shame, and, on the other, the conviction that what she and Tariq had done was not sinful; that it had been natural, good, beautiful, even inevitable, spurred by the knowledge that they might never see each other again.

Laila rolled to her side on the couch now and tried to remember something: At one point, when they were on the floor, Tariq had lowered his forehead on hers. Then he had panted something, either Am I hurting you? or Is this hurting you?

Laila couldn't decide which he had said.

Am I hurting you?

Is this hurting you?

Only two weeks since he had left, and it was already happening. Time, blunting the edges of those sharp memories. Laila bore down mentally. What had he said? It seemed vital, suddenly, that she know.

Laila closed her eyes. Concentrated.

~ A Thousand Splendid Suns


원론적으로는, 지나간 말--utterance--역시 다시 반복될 수 없습니다. 고로 말소리 역시 가볍습니다. 연인과 속삭인 달콤한 대화는 이미 지나가 버린 강물 같은 것이어서, re-iteration은 re-rendition에 불과할 뿐이고,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듯 같은 말소리에 두 번 귀를 적실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기억 속에서의 재생이야말로 가장 니체의 영원회귀에 가까운 개념으로 보여집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들고자 하는 예가 바로 프랑스 극작가 하씬의 비극 페드라(파에드라)입니다. 파에드라는 테세우스의 젊고 아름다운 새 부인으로, 왕의 전처의 소생인 히폴뤼토스와는 불과 몇 살 차이밖에 나지 않습니다. 신들의 장난으로 그는 히폴뤼토스를 맹렬히 사랑하게 되고, 상상 속으로 금단의 간음이라는 죄를 무한히 지으며 나날이 쇠약해져 갑니다. 이 이야기는, 어쩌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간음이 실제의 간음보다 더욱 무섭고 두려운 죄악일 수 있다는 점에서 영원회귀의 개념과 연결됩니다. 실제의 정사가 딱 한 번 일어난다면, 머릿속에서의 정사는 영원토록 반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복되는 것은 무겁습니다. 반면 실제 일어난 어떤 현상은 일회적입니다. 때문에 일회성에 대한 보상심리로 기억을 곱씹을수록 (마치 위의 라일라처럼요) 그 사건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더더욱 무거운 것이 되어갑니다. 무한히 반복하고 곱씹을 수 있지만, 그것이 계속될수록 그 실제 상황의 덧없음과는 더더욱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의 사건이 무한히 가벼워 손가락 틈으로 줄줄 흘러내리는 것이었다면, 녹화된 기억을 반복재생해 보는 일은 무한한 침잠에 가깝습니다. 실제 상황의 일회성에 대한 반감/ 반작용으로, 무한히 무거운 기억을 만들어 그 안으로 가라앉기까지 그것을 되새김질하는 게 인간의 속성인 것 같습니다. 게다가 정신의학에 의하면, 그 되새김질이 인간의 의식적인 노력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닌 듯 합니다.

“This is what bothered me so much about filing a lawsuit. The first thing Piper Rudnick wanted to do was create a list of ways that I’d been damaged. And I’m just, like, fucking unwilling to do this. What do you mean create a list? I’m not going to give you a list . . . because I can’t. I know I’ve been changed, hurt unbelievably. There’s not a moment that goes by that I haven’t been affected by this. Mr. Hanson used to masturbate the stick shift in the car, so I get in my car and immediately that memory comes to mind. Mr. Hanson shaved my face one of the first times it was ever shaved. So I put on shaving cream and he’s there. Mr. Hanson drank brandy, so I can’t stand brandy. Beer tastes like his urine. I kiss my wife and Mr. Hanson’s tongue is in my mouth. How do you count damage like that?

~ a sexual abuse victim, who got molested in his childhood

위의 화자는, 로펌의 변호사들이 그에게, 어린 시절의 성범죄 피해 경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의 인생에 피해를 주었는지 나열하라고 요청하자 위와 같은 답변을 했습니다. 아내와의 입맞춤은 순식간에 피의자와의 입맞춤을 상기시키고, 그 순간 그 사건은 무의식의 반사작용에 의해 현실로 회귀합니다.

밀란 쿤데라는 인간 기억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습니다. 쿤데라의 다른 장편(長편 말고) Ignorance의 주인공 조세프와 이레나는 자신들의 과거를 더 이상 분명히 기억해 내지 못하고, 조세프는 어린 날의 자신에 대한 기억을 부정하기 위해 청소년기에 남겨둔 일기장을 찢어버립니다. 이처럼 쿤데라에게 있어 기억은 끝없는 왜곡과 소실의 장에 다름 아닙니다. 그가 기억에 이런 의미를 부여한다는 의미에서 쿤데라가 기억을 다루지 않는 작가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쿤데라가 '기억' 자체에 대한 본인의 그러한 전제와, 또한 기억이 그의 소설에서 담당하고 있는 역할--심리상태를 부각시키는 일종의 대조 역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을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 그가 소설 서두에서 영원회귀의 가능성을 그토록 의심 없이 부정하는 것은, 기억에 대한 그런 근본적인 불신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쿤데라 역시 '꿈'이라는 소재를 통해서 회귀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표출하고 (다수의 쿤데라 작품 중 인물들은 같은 악몽을 반복해서 꿉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 삶이라는 유한한 기간을 좌표평면으로 할 때, 영원회귀와 그로 인한 존재의 무거움이 그렇게 인생과 동떨어진 이야기는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봅니다.


참조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글쓴이가, 영역본으로부터 한국어로 번역)
- 할레드 호세이니, 천 개의 찬란한 태양
- 하씬, 파에드라
- 뉴욕 타임즈 기사 "The Choirbo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