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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배설>/작희

#3 폴 오스터의 <우연의 음악>: 잉여에 대한 고찰

잉여인간에 대한 다른 설명을 읽고 싶으시다면 이 엔하위키 엔트리를 참조해 주십시오.


원고번호 #2
작희

폴 오스터의 <우연의 음악>: 잉여에 대한 고찰


YOLO가 카르페 디엠의 신세대 버전이듯, 요즘 시대의 '잉여'는 아마도 '식충이'의 현대화된 버전이 아닌가 합니다. 풍년이 축복이던 시절이 있었지요. 그런 의미에서 아마 원시 공동체에서 (그릇이 있다는 전제 하에 말이죠) '잉여생산물'은 신의 축복과도 같았을 겁니다. 공동체 내에서 어떤 생산물의 소비가 양껏 끝나고도 남아도는 그 무엇, 플러스 알파, 가 있다는 말이고, 그 '남아돎'은 미래의 결핍을 미리 메꾸는 무언가로 탈바꿈할 수 있었으니 결국은 공동체 내에서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 셈입니다.

잉여인간의 영역은 superfluous man입니다. overflowing, 즉 넘쳐흐른다는 뜻이고, 13세기 프랑스 의약학 서적에는 넘쳐 흐르는 지방을 지칭하기 위해서도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Oxford English Dictionary). 과다한, 이라는 현재의 단어 뜻이 정착되기 전까지는 단순히 풍족한 (copious), 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고 하니, 그 의미 변화 면에서 '잉여'란 개념의 사회적 의미의 성쇠 그 자체와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superfluous man의 전형은 사실 노문학에서 먼저 나타납니다. 푸쉬킨의 예프게니 오네긴이 잉여인간의 전형이고, 당대의 배드보이 레르몬토프의 <우리 시대의 영웅>의 주인공 역시 잉여로운 사람입니다. 극단적인 예로는 곤챠로프의 오블로모프도 들 수 있겠군요. 그는 반평생을 침대에서만 살며 세상을 관조합니다. 능력의 부족 때문이나 다른 환경적 요인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사회 안에 '낑겨 들어가기'를 시도할 의지가 없는 것이지요.)

오스터의 <우연의 음악>의 두 주인공 짐 내쉬와 잭 파지는 둘 다 '잉여로운' 인물입니다. 부품으로 따지면 이미 고장났거나 아예 불량품이어서, 사회라는 구조 내에서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하는 인물들이죠.

내쉬는 고장난 부품입니다. 고장의 원인은 지극히 미국적이며, 그 고장에 대응하는 그의 방법 역시 (50년대식일지언정) 지극히 미국적입니다. 그는 소방관이었고, 아내와 두 살 난 딸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사회의 일원입니다. 하지만 아내는 아이만을 남긴 채 내쉬를 떠나버리고, 내쉬는 소방관의 '기능'을 수행하며 동시에 아이를 돌볼 수 없었기에 아이를 친척 집에 맡깁니다. 자라나는 아이는 간헐적 면회만으로는 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하고, 내쉬는 마침내 아이가 아버지라는 존재를 그 세계에서 내쳐버렸음을 알게 됩니다.

때마침 그는, 어릴 때 자신을 떠난 아버지로부터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습니다. 그 돈으로 그는 사표를 내고, 차를 한 대 '뽑아서' 1년 남짓한 시간을 미국 전역을 차로 질주하고 돌아다닙니다 (이것이 왜 미국적인 해결책이냐고요? 롤리타를 차에 태운 험버트의 전국적 드라이브는 50년대 아이젠하워 정권 시절부터 시작된 미국의 자동차/ 고속도로 문화에 대한 풍자이기도 합니다).

이 시점에서 내쉬의 직업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분명 우수한 '부품'이었습니다. '소방' 역시 일종의 공공 서비스이니, 내쉬는 공공재에 딸린 부품이었던 셈이지요. 종종 부패나 권력 남용 등의 문제로 손가락질 받는 경찰관과는 달리, 소방관은 '고귀'한 직업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그 부품으로서의 우수성이 그에게서 개인성을 앗아갑니다. 가족 없이 그는 남편도 아버지도 아닌 단지 소방관 짐 내쉬일 뿐이고, 딸을 뒤로 하고 일에 매달리면서 그는 아마 그런 '기능성'을 뼈저리게 느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탈선은 그래서 무위도(道)식 (하는 일 없이 도로 위에서 밥만 먹는) 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기능성을 벗어버리고, 정해진 규칙 (출퇴근 시간이나 식사 시간 등) 없이 움직이는 개체, 즉 '개인'이 되는 것입니다.

상속받은 돈도 거의 다 떨어져 갈 때쯤 내쉬는 또 다른 '개인 (=잉여)'인 잭 파지를 만납니다. (이름이 잭팟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면 잘 포착한 것입니다.) 잭은 전문 도박꾼으로, 내쉬와 자신을 위해 계획 하나를 제안합니다. 외곽에, '플라워'와 '스톤'이라는 억만장자 두 명이 사는데, 그 둘은 포커를 좋아하지만 실력이 아주 없다는 것이지요. 그 둘을 등쳐먹어 '한탕 하자'는 것이 잭의 계획이고, 별다른 계획이 없는 내쉬 역시 이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플라워와 스톤은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고, 잭과 내쉬는 파산하고 거액의 빚을 져, 플라워와 스톤을 위해 무상 노동을 해 주는 방식으로 그 빚을 갚기로 합니다. 그 무상 노동은 어떤 거대한 벽을 쌓는 일입니다. 벽의 재료가 될 돌은 모두 유럽의 한 고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플라워와 스톤이 성 하나를 통째로 사서 돌더미 상태로 만든 후 미국으로 옮겨온 것이지요. 그들이 쌓을 벽은 단지 어떤 기념비가 될 것입니다. 그 기념비는 아무도 볼 수 없는 장소 (플라워와 스톤의 앞뜰) 에 있고, 아무런 기능도 수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노동을 시작함으로써, 내쉬와 잭은 또다시 그 무언가의 '부품'이 됩니다. 그 부품들에게, 고용주는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고, 원거리에서 Murks라는 감시인을 붙여 이들을 감시합니다.

플라워와 스톤은 미국 자본주의의 표상적 인물이며, 내쉬와 잭이 강제로 건설에 동원되는 그 벽은 자본주의의 현주소가 아닐까 합니다. 잉여로운 개인 (social misfit)은 부품이 되어야만 하고 어떤 기능을 수행해야만 하지만, 정작 자본주의라는 그 기계는 뚜렷한 목적도 기능도 없습니다. 그 기원은 유럽입니다만, 완전히 함몰된 채로 미국으로 옮겨져 미국적 자본주의로 거듭나고 있고, 모든 개인은 하나의 부품으로서 그에 귀속되어야만 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잭이 플라워와 스톤을 완전히 호구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지요. 잭이 완전히 섣부른 판단을 했다고만은 볼 수 없는 이유는, 플라워와 스톤이 전에 잭에게 (비교적) 소액의 돈을 (아마도 일부러) 잃어 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함정이지요. 잉여를 잡아 부품으로 만들기 위한 덫 말입니다.

내쉬와 잭은 마침내 빚을 다 갚습니다. 하지만 그 건설현장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빚을 다 갚은 바로 그 날 저녁, 내쉬와 잭이, Murks가 날마다 적어 가는 '일용할 양식 청구서'에 '매춘부'를 적어 낸 것이 (명목상의) 화근입니다. 매춘부를 요구하는 것이 반칙은 아닙니다.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청구하면 가져다준다, 는 것이 애초 계약상의 원칙이었으니까요. 하지만 플라워와 스톤은 이를 꼬투리 잡아 새 빚을 만들어 내고, 그래서 두 잉여의 계약 기간은 연장됩니다.

개인은 많은 경우 '빚'을 통해 사회에 속박되어 있습니다. 미국식 모델은 더더욱 그렇지요. <세일즈맨의 죽음>의 주인공은 평생을 사회의 소모품으로 일하고, 그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집, 자동차, 냉장고는 사실 그의 것이 아닙니다. 융자를 얻어 산 것이기 때문이지요. 죽을 때까지 빚을 갚는다는 말은 뒤집어 말해 빚을 갚기만 하다가 죽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빚이라는 지각 없이 살게 되지요. 사회적 제도 내에서 용인되고 장려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계약 조건에 위배되는 일이 아니지만 사실 그 때문에 부품으로서 우리의 계약 기간은 날마다 조금씩 연장되는 중입니다. (등록금 대출이 좋은 예 같습니다. 취직해야 하는--부품으로 서둘러 둔갑해야 하는--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빚을 다 갚았다 싶으면 어느 새 다른 빚을 지게 되고, 그런 의미에서 부품으로서의 삶은 채무자로서의 삶과도 같습니다.

잭은, 그들이 영원히 빠져나갈 수 없을 거란 사실을 간파하고 탈출을 시도하지만, 플라워와 스톤에 의해 (아마도) 죽임을 당합니다. 내쉬는 묵묵히,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탑을 쌓아 갑니다. 감시인 Murks는 기뻐하지만 사실 내쉬는 복수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는 마침내 Murks와 그의 사위 Floyd를 태운 차를 운전하다 일부러 옆 차와 충돌하는 방식으로 복수를 완료합니다. 통쾌한가요? 찝찝합니다. 정작 '주범'인 플라워와 스톤은 저 어딘가에서 태연히 햄버거를 먹으며 또 다른 잉여들을 덫으로 잡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Murks 역시 고용인이라는 점에서, 내쉬는 결국 또다른 부품 하나에게 대리적 복수를 한 것에 불과합니다.

요는, 잉여란 어쩌면 극도의 개체성의 구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회 내에 던져진 것은 내 선택이 아니고, 따라서 사회에서 기대하는 그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 것도 내 의무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러한 '개인으로서의 삶'을 누릴 길이 어쩌면 근본적으로 차단되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첫번째 장애물은 (종양으로 따지면 양성쯤 되는 강도의 것인데) 매슬로우 욕구 피라미드에 따른 우리 자신의 욕구입니다. 우리는 개인으로서의 삶을 갈구하면서도 모종의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하고, 성취감을 느끼고 싶어합니다. 문제는 그러한 소속감이나 성취감 등의 감정을 모두 사회기능의 수행을 통해 얻고 싶어한다는 점이지요.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어하고, 어떠한 조직의 일원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 장애물은 위선에 다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사실 기둥서방만한 직업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소속욕, 성취욕보다 더 강력한 장애물은 구조적인 것입니다. 내쉬가 '잉여'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막대한 유산 때문입니다. 파지 역시 도박을 하려면 '총알'이 필요하지요. 돈이 떨어지자 그들을 별 수 없이 플라워와 스톤을 찾아갑니다. 사회구조와의 포커게임에서 개인은 사실상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자유로운 삶을 누리기 위해 그들은 한동안 다시 어떤 기계의 부속품으로 일해야만 합니다. 문제는 그 자유는 아마도 한시적일 것이며, 영영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지요. 화려한 노후를 꿈꾸며 뼈빠지게 일하여 얻어낸 '개인'으로서의 존재는 분명 값집니다. 하지만 노후에 하고 싶었던 그것들을 우리는 왜 지금 할 수 없는 것일까요.

부품이 되기를 갈망하지 않고 개인으로 살아 숨쉬기를 원하는 그 어떤 존재가 바로 잉여인 것이라고 예찬하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고귀한 잉여는 아마 자발적 잉여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고귀한 자발적 잉여가 될 권리는 아마 처음부터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에덴동산의 뒷문[각주:1]으로 회귀하기 전까지는요. 





  1. 필진 이외의 독자가 몇 명이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은유의 출전을 알아맞히시는 분께 저자가 소정의 상품을 드립니다. 성경 아닙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