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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배설>/작희

#6 육체여 안녕: <사형장으로부터의 초대>와 영지주의의 관점에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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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여 안녕: <사형장으로부터의 초대>와 영지주의의 관점에서 (계속)


신시나투스를 '육체적 불완전함' (그러니까 다시 말해 영적 완전함에 한 발짝 더 가까운 상태)을 갖춘 성인으로 보는 데에서 지난번 글을 끊었었지요. 그의 성인적 면모는 단지 외모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그는 마치, 생명체라면 누구라도 지녀야 할 생존의지--먹고, 자고, 성교하는 것으로 이루어진--가 결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반대로, 생존의지를 상징하는 인물은 신시나투스의 아내인 마르테입니다. 마르테는 굉장히 아름다운 여성으로 소개됩니다. 우윳빛 피부에 커다란 가슴과 통통한 허벅지, 장밋빛 뺨을 가진 여인으로 묘사됩니다. (나바코프는 그녀의 허벅지 속살이 "tender, quivering"하다고 써 놓았네요. 다시 말해 그녀는 살짝 그로테스크하리만치 성적 매력이 넘치는 여성입니다.) 그에 반해 신시나투스는 끊임없이 성장부진에 시달려 온 인물 같습니다. 그의 발은 너무 작아서, 여자인 마르테가 그의 신발을 신고 걸어다닐 수 있을 정도입니다. 정부에서는 그를 장난감 공장에서 일하도록 배치하는데,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의 몸이 아주 작고 유약하기 때문이지요. 이 장난감 공장이라는 직장은 신시나투스가 어떤 의미로는 아직도 유년기에 머무르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마르테는 결혼 후 끊임없이 이 남자 저 남자와 거의 하루가 다르게 불륜을 저지르고, 그녀가 낳은 두 아이들은 모두 신시나투스의 아이가 아닙니다. (신시나투스가 어쩌면 성적 불구가 아닐까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기도 하지요.) 생존의지의 궁극적 표상은 끊임없는 교미에 의한 유전자의 보존이며, 마르테와 신시나투스는 바로 그 점에서 상극을 이룹니다.

마르테는 첫 아이를 임신하여 출산한 후 곧바로 둘째 아이를 가질 만큼 육체적 생산력이 흘러넘치는 여인입니다. 다산이라는 것은 육체적 세계에서는 축복이지만, 영지주의적 관점에서는 단지 물질적 존재를 연장시켜주는 그 무언가이자 육체적 사랑과 그에 따르는 범죄의 결과물에 불과합니다. (이는 러시아 철학자 표도로프의 관점과도 닿아 있는 면이 있지요.) 이런 출산과 양육에 대한 부정적인 각도는 마르테의 두 아이가 모두 불륜의 산물이라는 점, 그리고 또 그 두 아이가 모두 어머니와는 달리 대단히 못생겼으며 불구라는 사실에서 나타납니다. 그런 점에서 마르테는, 밀튼의 실낙원에 등장하는 마귀의 딸 '죄'와 닮았지요. 죄(Sin)은 끊임없이 잉태하여 끔찍한 '죄의 삯'들을 출산해 내는데--그리스 신화로 따지면 에키드나쯤 될는지요--자기 자신의 육체적 풍요로움에 의해 끊임없이 고통받는 캐릭터라고 보시면 됩니다. 

마르테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자면, 나바코프는 그녀를 일종의 육체적 삶 그 자체로 표현한 듯 합니다. 그녀가 등장할 때마다 그녀는 음식을 먹고 있거나 들고 있지요. 다시 말해 우리가 보는 그녀의 삶은 먹고 성교하고 출산하는 것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남편을 면회 온 그녀가 신시나투스에게 한 마지막 제안은, '마지막으로 한 번 하게 해 주겠다'는 것인데, 신시나투스는 이를 거절합니다.) 신시나투스가 그녀를 다른 남자와 함께 침대에서 발견했을 때 그녀는 즙이 많은 복숭아를 침대 위에서 깨물어 먹고 있었고, 그 즙이 그녀의 보드라운 유방 위로 흘러내리고 있었지요. 그녀가 장바구니를 들고 빵을 사러 시장으로 나설 때면 어김없이 이런저런 남정네가 그녀의 뒤를 따라갑니다. 신시나투스와 마르테 내외는 종종 마르테의 애인들 중 하나와 함께 저녁을 먹곤 하는데, 그 중에도 마르테와 그녀의 애인은 서로에게 끊임없이 추파를 던집니다. 이 모든 육체적 행위들이 신시나투스에게는 다른 세상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감옥에서 주는 음식은 아주 훌륭하다고 표현되어 있고, 감옥의 소장은 끊임없이 신시나투스에게 이런저런 간식거리를 가져다줍니다만 (자두 한 바구니라든지요), 신시나투스는 이를 모두 거부하고, 마침내 감옥에서도 그를 포기하고 멀건 죽을 가져다주기 시작합니다. 마치 광야에서 돌을 빵으로 바꿔 보라는 시험을 받은 예수와도 비슷한 모습입니다.

신시나투스는 마르테를 자기 감방에 있는 커다란 거미에 비견하는데, 이는 까만 거미가 벨벳 드레스를 입은 마르테와 비슷하게 보여서이기도 하지만, 그 둘이 공통적으로 지닌 생활력(resourcefulness) 때문입니다. 생활력이라 함은 어떤 유기체가 자신의 생물학적 목숨을 부지하려는 의지로부터 행하는 일련의 일들인데, 바지런히 사냥감을 잡아 저장하고 먹는 거미의 모습이, 바지런히 일해 얼마 되지 않는 수입으로 두 아이를 먹여 살리고 살림을 하는 마르테와 닮아 있다는 것입니다. 생활력이 물질적 생존 그 자체라면, 온 세상이 영혼에게 있어서는 감옥인 셈입니다. 세상은 어쨌든 생명체의 생존의지로 인해 돌아가고 있는 것이니까요. 신시나투스가 탈옥을 포기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감옥에서 몸이 빠져나간다 해도, 온 세상이 영혼에게 있어서 감옥이라면 감옥에서 빠져나가도 나간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영혼은 물질적 몸에 갇혀 자유를 잃은 상태입니다. 영지주의 교리에 따르면 이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gnosis, 즉 절대적이고 우주적인 지식을 체득하는 것뿐입니다. 나바코프는 이 '지식'이 바로 '상상력'과 일맥상통하는 그 무엇이라고 보았던 것 같습니다. (이전 글에서, <초대>가 세속적 세상에서 살아가는 예술가에 대한 묘사라고 했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상상력이 절대적 지식이자 유일한 탈출구라는 것은 바로 그 예술가 주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나바코프는 'doubles'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또 다른 자아, 분신, 정도 되는 그 무언가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소설 전반에 걸쳐, 우리는 신시나투스의 또 다른 자아가, 소심한 신시나투스 자신은 절대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을 대담하게 벌이는 것을 목격합니다. 또 소설 초반에서 나바코프는, 우리 모두에게 이런 제 2의 자아, 분신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분열적 자아 역시 영지주의적 개념입니다. 육신의 자아는 물질적으로 세상에 구속되고 매여 있는 반면, 영적인 자아는 그 물질적 세상의 속임수를 꿰뚫어보고 물리적 제한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가령, 나의 영적 자아는 내가 지금 3층에서 뛰어내려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멀쩡하겠지요.) 이 양면성은 신시나투스와 제 2의 신시나투스에게도 분명히 해당됩니다. 그 둘은 마치 서로 다른 평행우주, 다른 차원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제 2의 (용감한) 신시나투스는 마르테와의 면회가 거절당했을 때발을 구르고 소리를 질렀고, 간수인 로디온의 얼굴을 발로 짓밟지만, 진짜 신시나투스(사실 뭐가 진짜인지도 모르지만요)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고분고분 알았다고만 대답할 뿐입니다. 이 분열은 결말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전자(용감한 신시나투스)는 대담히 십자가 모양의 사형집행대에서 일어나 세상 밖으로 걸어나가지만, 후자(고분고분한 신시나투스)는 사형대에 남아 조용히 도끼를 받아들입니다.

이 두 가지 일들이 실제로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으니, 나바코프가 두 가지 세계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그 두 가지 세계는 물질적 세계와 상상력의 세계입니다. 반항아 신시나투스는 상상력의 세계에 살고 있지요. 나바코프에 따르면, 그 세계는 유일하게 '탈출'--절대적인 탈출--이 가능한 세계입니다.

"(Pierre) What are these hopes, and who's the savior?"
"Imagination," replied Cincinnatus."

"(피에르) 그 희망이란 뭐고, 구원자는 누구죠?"
"상상," 신시나투스는 대답했다. 

~ pp. 114

그런 의미에서 그 상상력 세상 속의 자아는, 신시나투스의 창작 욕구와 직결됩니다. 글을 쓰는 행위야말로 또 하나의 우주를 창조하는 것이고, 그 우주 안에서만 한 영혼이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처럼 온전히 저 세상으로의 탈출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육신을 '거역,' 또는 '무효화'해야 합니다. 그 거역은, 순순히 참수형을 받아들이는 것, 그러니까 자신의 육체와 별다른 거리낌 없이 이별할 수 있다는 바로 그 깨달음의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참수형을 용감하게 받아들이고 육체를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참된 구원이라는 겁니다. 바로 그 순간 신시나투스는 진정으로 자유한 상태로, 아무도 자신을 괴롭히지 못할 곳,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살고 있을 다른 그 어떤 세상으로 떠나게 되는 것이지요.

사형 집행인 피에르가 신시나투스를 처음 만났을 때, 신시나투스는 피에르가 사형 집행인인 줄 알지 못하고, 그냥 그가 요새 내의 다른 감방에 수감된 다른 죄수라고 생각합니다. 피에르는, 자신이 감옥에 온 이유는 신시나투스의 탈출을 돕기 위해서라고 말하지요. 나중에 피에르가 사형 집행인이라는 것이 밝혀졌을 때 대부분의 독자들은 처음의 그 소개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만, 참수형이 탈출의 상징이라고 할 때 그 거짓말에도 모종의 진실이 숨어 있습니다. 머리를 베어 없앰으로써 육신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이 참수형이라면, 그 참수형의 집행인이야말로 탈출의 진정한 공범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사형장으로의 초대>는, gnosis (앎)이라고 하는 형이상학적 개념을, 스스로의 상상력--말 그대로, 상상할 수 있는 힘--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을 통해서 메스꺼운 육체적 존재를 초월하게 되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처음부터 육체적 세계로부터 다소 멀리 떨어져 있던 영지주의적 성인 신시나투스는, 성공적으로 육체에 작별을 고하고 자유로운 초월적 세계로의 탈출을 이루어 냅니다. 이런 의미에서 <초대>는, 자유와 진리를 찾는 한 구도자의 여정을 비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나바코프가 자기 자신을 하나의 구도자로 보았음은 말할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물질적 (정치적) 한계와 구속을 넘어, 문학이라는 매개를 통해 자유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있는 그런 구도자 말입니다.

긴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