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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배설>/에이넉스

#2.5 1시 55분

- 내일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결국, 그를 불러냈다. 약속 시간은 2시. 그는 약속 장소에 10분정도 일찍 도착하곤 했다. 그는 지금쯤 까페에 들어가 있겠지. 그리고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직감이 여자에게만 있진 않다고 말하던 그였으니. 그리고 마지막 수를 세고 있겠지. 공격이든 방어든. '무슨 일로 불렀어?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 무슨 일 있어?'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천연덕스럽게 나를 맞이할 것이다. 그것도 의도적이고 작위적인 천연덕스러움으로. 혹은 오늘 점심은 뭘 먹었는지, 옷은 어떻고 머리는 어떻고 하면서 안부를 먼저 물어올 것이다. 시작은 미소, 그리고 반 톤 정도 높은 목소리를 유지하면서. 그 순간에 그는 자연스럽게 주도권을 낚아채갈 것이다. 나는 이제 그걸 뚫어야 하겠지. 

 약속장소를 정문 앞 까페베네로 잡은 건 실상은 무의미한 실용주의의 결과물이다. 가깝기 때문에 잡아버린 장소. 까페베네는 딱히 추억할 것도 없는 장소다. 와인빙수나 한두 번 정도 먹으러 오곤 했었지. 되려 자주 보곤 했던 곳은 커핀 그루나루였다. 공부를 할 때면 나와 그는 커핀 그루나루 2층 창가 자리에 하루 종일 죽치고 앉아있곤 했었으니. 사람들이 보이고, 비가 창가에 맺히던 그 자리. 그럴 때마다 무언가 동떨어진 우리만의 세계에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했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말이다. 실상은 창문 한 장 두께에 불과했는데. 추억의 장소와 별 의미 없이 가까운 장소 중에 난 어느 쪽을 골랐어야 하는 걸까. 

 와인빙수는 달달한 듯 한 맛으로 시작해서 아무것도 아닌 맛으로 끝난다. 물론 곳곳에 박혀있는 치즈는 빙수답지 않은 포근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다. 오묘하고 애매한 단맛으로 시작해서 결국 끝은 입천장을 핥는 맛에 불과하다. 매력이라면 매력이고 실망이라면 실망이다. 

 그는 혼자 먹는 밥이 더 편하다고 했었다. 막막함과 무수함 속에서 서로에게는 서로가 마지막 탈출구이곤 했었다. 외로움에 몸서리치다 더는 외롭고싶지 않을 때 그는 나를 찾았고, 나는 그를 거절하지 않았다. 외로운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고, 권태로운 삶에 새로움을 불어넣고 싶었기 때문에. 그는 필요에 의해 나를 찾았지만, 결국 다시 외로워했다. 그를 만날 때는 즐거웠지만, 무료함의 근원은 뿌리뽑히질 않았다. 진통제. 모든 건 그 순간뿐. 결국 나는 그를 만나는 순간마저 권태로웠고, 그와 동시에 그는 외로워졌다. 

 쉽진 않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또 다른 한 관계의 단절이고, 한 시절의 끝이고, 현재 일상의 파괴니깐. 그는 다시 담배를 피우겠고, 나는 술을 마실 것이다. 내가 폭식과 거식에 시달릴 때, 그는 게임에 한창 몰두 중이겠지. 

 어느새 정문 앞. 눈앞에는 약속장소 까페베네. 나는 아무래도 한동안 와인빙수를 먹을 수 없을 것이다. 창 너머로 그가 보인다. 내 발걸음 소리가 낯설다. 1시 55분. 그와 헤어지기 5분 전.







 작년 이맘 때 썼던 글입니다. 두매 익게에도 올렸었죠. 원래는 단편소설로 써볼까 하고 있었던 글감 중 하나였는데, 어째 어떻게 발전시켜 볼 방법이 없어서, 그렇다고 아예 폐기해버리기는 아까워서 그냥 써봤던 글입니다. 아마 앞으로도 이 글이 단편소설로 발전하는 일은 없을테죠. 딱히 잘 쓰인 글은 아니지만 주제가 대충 적절하기에 용기를 한번 내어서, 그리고 다른 분들도 용기를 내어 글 좀 쓰시라는 차원에서 한번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