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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배설>/심연

어떤 이야기(1)

 

아아, 모국어가 멸종했다.

 

무시무시한 적막 속에서 거친 숨을 내쉬던 그것이 한순간 숨을 멈추었다. 세계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고요해졌으므로, 소리의 없음이 더 이상 무섭지 않게 되었다. 본래 아무 것도 놓여 있지 않은 곳에서 결핍감이 느껴질 리가 없다. 이 순간을 조각으로 남긴다면 팔의 단면이 말끔하게 잘려나간 형태의 흉상이 어울린다. 가슴 아래는 이 느껴질 기미도 없이 시원하게 부재한다. 이 이야기는 아주 짧고 간결한 침묵의 시간을 위한 이야기다. 그것이 다시 노래하기 시작할 때, 이야기는 비로소 다시 잠에 들 것이다.


어두운 한 가운데에 빛이 놓여있다. 동굴 천장에 구멍이 뚫려 생긴 것처럼 동그랗고 환한 모양으로 그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빛은 탁자의 형상을 하고 있는 바위 위에서 오랜 시간을 관조해 왔다. 작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무수한 따뜻한 기억들을 반추해 보았지만, 이제 기억의 일부는 신화가 되고 또 일부는 상상의 영역으로 넘어와 버렸다. 공상 속에서 원하는 형상을 불러내는 일은 언제든 몇 번이고 해보지만 실제의 무언가를 만난지 오래이므로, 이미 상상 속에서 충분히 변형되어버렸는지도 몰랐다. 빛은 이제 그만 나가보기로 결심했다. 그저 마음에 드는 형태의 무언가가 간절하게 그리웠으므로.

들어오는 길이 없었으니, 나가는 길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빛은 한 번도 여기에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빛의 기억 속에서 시간은 있어도 공간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항상 있는 그곳이 유일한 자리였으니, 앞이 없으니 뒤도 없고 좌가 없으니 우도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서서히 자세를 바꾸어보는 수밖에 없다. 자세에 대해서 인식하게 된 것도 비교적 근래의 일이다. 그 전까지는 자세의 다름이 만들어내는 차이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했다.

모든 입자가 제 자리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입자 하나에 온 신경을 쏟았다. 어디에 있는 입자인지는 모르겠지만 단 하나의 입자를 제대로 느낄 수 있게 되자, 그 입자를 통해 압력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대체 어디서 나오는 힘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해서 힘을 줄 수 있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다. 다른 입자로 초점을 옮겨서 계속 해 나갈 뿐이다. 측량할 수는 없지만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문득 이질적인 감정이 솟아났지만 빛이 알고 있는 어떤 개념으로도 충분히 포획해낼 수가 없었다. 그 감정을 그대로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었지만 입자들에 힘을 주고 있는 사이에 이따금씩 다시 떠올랐다.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느낌으로, 일정한 주기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빛은 대략 몇 개의 입자를 건드리면 그 느낌이 돌아오는지를 기억했고, 그때마다 잠시 멈춰가곤 했다. 짧은 안식이었다.

마침내 모든 입자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몹시 낯선 기분으로 빛은 스스로의 형체를 새로이 지각할 수 있었다. 빛을 둘러싸고 있는 껍데기가 불안정하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이윽고 힘을 주자 껍데기가 벗겨졌다. 껍데기가 오래된 각질처럼 떨어져나가는 순간 안과 밖의 구별이 생겼고 비로소 공간이 빛의 관념 체계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껍데기가 있던 경계선을 지나 입자를 조심스레 내보내고 나서 빛은 비로소 자신이 이곳에 어떻게 들어왔는지를 기억해냈다. 기억에 없던 것을 기억해냈으니 상상인가 싶기도 했지만, 이동의 감각이 되살아나면서 자신에게 각인되어 있던 기억이 되살아난 덕분일 것이다. 그래서 빛은 들어왔던 대로 다시 밖으로 나갔다. 아무런 불필요한 움직임 없이 단번에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실은 먼 곳을 향한 긴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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