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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배설>/심연

강잉(強仍)

강잉



담뱃잎이 담긴 통을 여는 것으로 나의 너저분한 일상이 시작된다. 일상이라면 마땅히 더러울 것이, 그 첫번째 조건이라고 생각하기에 아침부터 아주 완벽한 일을 하는 셈이다. 금속으로 된 물건이긴 하지만 호주머니에 넣은 채 걸어다니며 쓸리고 꺼내면서 쓸려서 겉의 아름다운 도색은 전부 벗겨졌다. 어쩌다가 물에 한 번 빠뜨렸는데 제대로 말리지 않고 닫은 덕택에 통을 돌려서 열 때면 괴상한 음악 소리가 들린다. 적어도 내게는 음악이다. 안에 들어있는 담배라고 해도, 한 주먹에 10환짜리 싸구려니 이런 통 따위야 거지를 줘도 안 가져갈 것이 분명하다. 흡사 기침병 환자가 약을 삼키고 만족하듯이 나도 허겁지겁 오줌맛 나는 담배를 빤다. 잉여인에게는 이 정도의 생활이 적합하다.


부엌으로 나가면 아내가 손을 씻고 나서 앞치마에 문지르고 있다. 내가 일어나서 담배를 한 대쯤 태우고 올 시간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집에는 시계가 없다. 예전 내가 실수로 불을 꺼트렸을 때 이를 무마하기 위해서 큰돈을 써야했기 때문이다. 오래된 시계는 아니었지만 공업학교를 졸업할 때 양친께서 주신 거라 소중히 여기고 있었는데, 생활은 별수없다. 아내는 한숨을 푹 쉬고는 고개를 숙인 채 방으로 들어간다. 아내는 아마 라디오를 듣다가 잠이 들 것이다. 나는 손과 발을 아내가 데워놓은 따뜻한 물로 적시고 화로 앞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조금 불안해보여서 이모저모 살펴보았지만 아내가 잘 관리했는지 잉걸불이 꽤나 강렬하다.


아내와 결혼하여 잉여계급이 되고, 아내집에 들어와 살게 되면서 시작한 일이지만 역시 나쁘지 않다. 생각해보면 공업학교에서 배운 건축 일하고도 그렇게 크게 다른 것도 아니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을 계속 이어지게 한다는 점─심플하다면 심플하지만 기실 수많은 손들이 끊임없이 몰래 움직여줘야 한다─에서 동일하고 이 점이 꽤나 멋지게 생각되었다. 그렇지만 가만히 앉아서 불을 보고 있다가 가끔씩 바람도 불어넣어주고 하노라면 스멀스멀 자괴감이 올라올 때가 있다. 일상이 점점 멍청해져간다는 것을 나도 모르는 바는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입 벌리고 어항을 빙글빙글 돌아가는 잉어보다 못한 것 같다.


그럼에도 아내의 집안에서 5대째 이어오고 있는 이 일에, 아내는 꽤나 자부심을 갖는 모양이다. 본래부터 공인된 화부 집안은 아니었으나, 아내의 아버지 즉 나의 장인대에 이르러 그 노력을 인정받아 궁으로부터 명인의 지위를 받아 잉여계급의 일단인 화부로 편성되었다. 물론 위엄있는 여왕폐하와 성스러운 선조대왕들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불을 꺼뜨리지 않고 지키는 일은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다. 이 불로 말하자면 이 나라를 지켜주는 빛이며 백성들을 잠재우는 온기다. 가장 고매한 승려들만 다룰 수 있는 이 '영광의 불'을 돌볼 수 있어서 그야말로 영광이다. 그것도 나 같은 족속이 아내와 결혼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일에 종사할 수 있는 것은 위엄있는 여왕폐하의 성은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한 번 절을 하고 조그만 장작을 집어 넣었다. 창문 밖에서 잉잉 바람이 전깃줄을 스치고 지나갔다.


가만히 앉아서 불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잡다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불에 집중하기 위해 생각을 아무리 지워도 허전한 욕망은 지워지질 않는다. 아내와 함께 잠들었던 것이 언제였던가. 화부 집안의 일원으로서 해서는 안 될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일 년에 단 두 번의 잠자리는 역시 가혹하다. 일 년에 휴일이 이틀뿐인 것은 어떻게든 참을 수 있으나, 아내의 얼굴을 가까이서 본 기억도 가물가물하니 이런 우울한 생애가 또 있을까. 일 년에 두 번 있는 궁궐의 축제는 모두에게 큰 경사지만, 우리 불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즐거운 날이다. 축제를 위해 승려들이 불을 모셔가기 때문에 그 날만큼은 마음 편하게 쉴 수 있는 것이다. 부부관계도 그 날만 허용되므로 마음만 같아서는 밤새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어도 독실하게 위엄있는 여왕폐하를 모시는 아내의 성격상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사실 요새 드는 생각은 욕정도 욕정이지마는 어떻게 아이를 가질 수는 없을까 하는 걱정이다. 슬슬 우리 부부도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데, 지금까지 일 년에 두 번 기회를 가졌어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어떨지 기약이 없으니 참담하다. 자식이 있어야 불을 지키는 일도 이어갈 수 있을텐데 말이다. 운잉(雲仍)... 애초에 이래서 과연 손주를 볼 날이 인생에 올 것인가 하는 우리 부부에게는 멀고 먼 단어다.


이글거리는 불빛을 보니 조금 흔들렸던 마음이 다시 진정된다. 불을 모시는 일을 영광으로 알아야 하거늘...장인 어른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 같다. 물론 그렇습니다요, 허나. 어릴 적에 장래희망을 현모양처로 썼다가 장인께 꾸지람을 들었다던 아내의 말이 생각났다. 화부의 집안으로서 영광인 줄을 알아야 할 것이야. 어쩌면 차라리 아이는 없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아마 내 자식의 장래희망 또한 화부일 것이다, 아니 화부여야만 할 것이다. 이쯤 생각하니 가슴 한 가운데에 단단하게 진 응어리가 만져지는 것 같다. 숨이 턱 막히면서 눈에 촉촉한 무언가가 고인다. 감정과잉은 금물이거늘.


이때 문이 발칵 열리고 아내가 나를 급하게 부른다. 얼른 소매로 눈가를 문지르고 아내 쪽을 본다. 라디오에서 곧 중대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아내와 나는 불을 향해 한 번 절하고 저 멀리 있는 궁 방향으로 절을 했다. 마지막으로 오래된 나무라디오를 향해 깊게 절을 했다. 곧 축제 때 들은 적 있는 승려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위엄있는 여왕폐하와 성스러운 선조대왕들의 영광을 위하여. 방에 앉아 있는 아내는 미동도 하질 않는다. 그렇게 천천히 낭독이 끝날 때까지, 그래서 방송의 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아내는 움직이질 않는다. 아마 아내는 울고 있을 것이다. 그런 여자다, 아내는. 위엄있는 여왕폐하의 잉태 소식에 감격하여 소리죽여 울음을 터트리고 말. 기뻐서인지 슬퍼서인지 종잡을 수 없지만 어인 일인지 내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끝내 나는 갈라진 목소리로 말한다. 강잉(降孕) 축하드리옵니다.



*노트


- '잉' 자가 들어가는 글을 쓰고 싶었다. 한컴사전의 검색 기능을 활용하여 보니 여러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강잉. 과잉. 배잉. 태잉. 회잉. 잉잉. 한자가 한자다보니 거기서 거기인 단어들이 많았지만, 그 중 '강잉'이 동음이의어여서 마음에 들었다.


- 처음에는 작가 이상을 생각하며 쓰기 시작했지만, 쓰다보니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스러운 내용도 들어간 것 같고 결말은 입에 담기가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어쩐지 식민지 지식인스러운 분위기가 나는 것 같아 다행이다. 그렇지 않게 느껴진다면, 유감이다.


- 위엄있는 웹진 배설의 영광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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