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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연애 이야기/짝사랑에 실패하는 n가지 방법

가벼움과 무거움과 말과 돌

가벼움과 무거움과 말과 돌


나는 너에게 비트와 바이트로 글을 쓰고 있다. 칼비노는 1985년, 하버드에서의 강연을 앞두고 사망했으며, 그가 보았던 가벼움의 정수 -- 해저를 지나는 전화선 -- 는 지금 우리 삶에서는 오히려 이미 무거운 침전물이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없이 많은 생각의 파편과 자음과 모음이 -- 0과 1과 미세하고 균일한 파동 여럿으로 쪼개진 음성들이 -- 내 주변의 허공을 날고 있다.


요즘 이탈로 칼비노라는 작가에 푹 빠져 있다. 아마 영 불가능한 프로젝트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면 -- 내가 언어 여러 개를 실제로 배워 내서 구사해야 하는 학생이 아니라, 그냥 책 좋아하는 애서가였다면 -- 이탈리아어로 되어 있는 책을 어떻게든 구해, 내 알량한 불어와 서반아어에서 라틴어 어원을 끄집어 내고 사전을 뒤져 가면서라도 이야기를 다 읽어 내려갔을 것이다.

칼비노가 내세우는 화자들은 모두, 현대문명이 하나의 거대한 신기루일지도 모른다는 찰나의 의구심에 사로잡힌다. 그 의구심은 대개 순간의 의심이며, 그들은 어떤 작은 계기를 통해, 지구와 인류의 긴 역사 속에서 현대 생활이 차지하고 있는 입지를 고찰하지만, 그 생각의 필라멘트는 곧바로 소진되고, 현자는 이내 세상으로 돌아간다. 샤워기 아래에 선 남자는, 방울방울 떨어지는 물줄기가 굵어지기까지의 그 짧은 동안, 인간에게 물이 다시 예외적인 것이 되는 시대가 다시 도래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물을 도시로 끌어오기 위해 고민하고, 돌덩이를 깎아 세워 관개로를 만들고, 그 영광스런 물줄기를 가장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두기 위해 각 도시 정중앙에 목욕탕을 세우고, 분수를 설치한 고대인들에 대해 생각한다. 요컨대 물이 이렇게 보편적이 되어 버린 시대, 수도꼭지 하나만 돌리면 피부를 감싸는 더운 물줄기를 느낄 수 있는 시대는 인류 역사의 기나긴 시간에 아주 잠시 동안만 찾아온 예외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Last summer there was a big drought in Northern Europe, pictures on the TV showed wastes of fields reduced to a cracked and arid crust, once prosperous rivers shyly revealing their dry beds, cattle nuzzling in the mud to get some relief from the heat, queues of people with jugs and jars by a meagre fountain. It occurs to me that the abundance I have been wallowing in until today is precarious and illusory, water could once again become a scarce resource, hard to distribute, the water carrier with his little barrel slung over his shoulder raising his cry to the windows to call the thirsty down to buy a glass of his precious merchandise (The Call of the Water, 207)."



또 다른 단편소설은 빙하기의 재림을 다룬다. 사랑하는, 하지만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여자를 집으로 들이고, 그녀에게 위스키 온 더 락을 내어주기 위해 정육면체 모양의 얼음들을 얼음곽에서 꺼내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남자와 여자의 대화는 끊임 없이 개수대로 흐르는 물 소리에 의해 단절되어 있다. 마침내 그가 얼음을 잔에 담아, 거실로 나섰을 때, 여자는 옷을 모두 벗어 던지고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고, 남자는 그에게 다가가고자 하나, 이미 그들 모두 얼음의 감옥 속에 갇혀 있다. 영겁의 시간에 비추어 볼 때 찰나에 지나지 않았을 간빙기가, 방금 끝난 것이다.

로버트 해리슨은 Entitled Opinions라는 라디오 토크에서 '가벼움'의 대명사로 칼비노를 제시했다. 해리슨에게 칼비노는 가벼움과 무거움의 작가다. 한없이 투명하고 형체가 없는 그 무언가 -- 물 -- 를 나르기 위해, 고대인들은 무거운 돌로 수로를 지었다. 덧없는 것, 금방 녹아 사라질 것으로 생각되었던 얼음은 곧, 인류를 옭아매는 철 족쇄가 된다. 기아와 갈증에 대한 걱정이 없는 삶, 윤택한 현대 생활의 상징이었던 냉동실 안의 얼음 -- 길들여진 자연 -- 은, 냉장고를 탈출하자마자 인간이 쌓아 올린 모든 것의 덧없음을 보여준다.

(이 모든 통찰을 칼비노는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라는 우화집에서도 선보인다. 마르코 폴로는 쿠블라이 칸에게, 자신이 보고 지나온 도시들에 대해 설명해 주며, 각각의 도시에는 주민들의 욕망과 기억이 새겨져 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도시를 만들고, 물건을 들여와 사고 판다. 도시의 폐허의 모든 파편에는 또한 그 욕망의 기억이 새겨져 있다.)

인류 문명은, 가벼운 것을 나르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무거운 것들의 역사이다. 그 가벼운 것의 흐름과 그 흐름을 지배하는 패턴이 사회 질서이고, 그 흐름이 불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고층 빌딩이고, 고속도로이고, 그 위를 달리는 무수한 철제 갑각류이고, 전철이 다니는 지하 터널이고, 이 모든 것을 생산해 내는, 철과 알루미늄과 플라스틱과 유리를 또 다른 갑각류로 조립해 내는 공장인 것이다. 관계의 표현이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으로 양분되어 존재하게 되는 것이 문명이다.

해리슨은 칼비노가 '가벼움'을 멸종의 대안으로 제시한다고 주장했다. 침전과 석화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없이 가벼워져야 하고, 인류가 쌓아 온 모든 무게를 벗어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 칼비노가 제시한 대안은 '가벼움'이 아니라,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그 어떤 상태였다. 가볍고 빠르게 연인에게 메시지를 전할 필요도 없고, 그 가벼움과 빠름을 이루어 내기 위한 무거움도 존재할 필요가 없는 상태. 그것이 바로 'presence,'즉 '임재'다. 임재는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다. 가벼움과 무거움이 스펙트럼의 양극쯤 된다면, 임재는 정도의 차이를 고려할 필요가 없는, 대단히 흑백논리적인 개념이다. 삶을 사는 방식에 있어서, 그리고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에 있어서, 칼비노가 가장 이상적이라고 본 것은 바로 그 임재가 아니었을까 한다.



너는 내가 너에게 전하는 모든 말이 -- 소셜미디어를 통해 전신처럼 온전치 못한 말로 날아드는 것들이 -- 싫지 않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비트와 바이트 없이 네게 무언가를 전할 방법을 고민해 보았다. 가벼움과 무거움의 간극 없이 말을 전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에 기억을 담을 수 있을까. 잘 정돈된 말과 글, 그리고 그 글을 비트와 바이트로 흘려보낼 수 있는 세상 역시 찰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내가 칼비노에게 그토록 매료된 건 내가 날마다 가지고 사는 모든 의심과 불안을 그가 글로 풀어내서일 것이다. 사실로 믿어 왔던 모든 것이 뒤흔들리는 순간이 바로 종말이며, 그런 의미에서 칼비노가 조심스레 상상한 종말은 그가 실제로 목도한 2차 세계 대전이었을지도 모른다. 인류가 그간 쌓아 온 모든 존엄성과 모든 가치들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릴 때, 그 때에도 내가 너에게 전달하는 모든 지시어와 지시물의 상관관계가 존속될 수 있을까. 그 지시어와 지시물의 관계조차도 세상의 질서와 분리될 수는 없다. 언어를 쌓고 쌓아도, 너에게 평생 끝나지 않는 편지를 쓴다 해도, 나는 결코 그 질서를 거치지 않고는 네게 닿을 수 없을 것이다. 연인과 태연히 위스키를 마시고, 함께 욕실에서 더운 물로 샤워하는 그 행위조차, 인류가 물과 쌓아 온 관계와 분리할 수 없듯이.


여행자 마르코 폴로는 현지의 말과 글을 알지 못했다. 쿠블라이와 폴로는 단단한 물질 -- 체스 판의 말과, 폴로가 가지고 들어온 각종 기이한 기념품 -- 을 가지고, 비유와 상징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끔 그래서 나는, 너에게 어떤 물체를 전달하고 싶다. 어느 날은 솔방울을 내밀 수도 있고, 또 어떤 날은 자갈을 하나, 사과를 한 알 손에 쥐여 줄 수도 있다. 솔방울은 존재하고, 자갈도 존재하고, 사과도 존재한다. 그처럼 나도 존재하고, 너도 존재한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임재할 수 있는 상태를 이루었으면 좋겠다.

세상이 온전치 않다면 그 세상의 질서 밖에서 소통하고 싶다.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에 아무런 차이도 아직 성립되지 않았을 때, 이브가 아담에게 아무 의미도 담기지 않은 과일을 건네 주고, 새를 보여줄 때, 과일과 새와 여자와 남자가, 약속된 질서와 그 질서를 이행해 줄 시설물 없이도 그저 하나의 세상으로 묶여 있었을 그 어느 때처럼. 

다만, 그것이 가능해질 미래의 어떤 시점까지, 우리는 전화선 너머의 파동과 비트와 바이트로 서로에게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