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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정기 연재/'타인의 얼굴' by 작희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은총> 2

(계속)


거대한 문들이 보였다. 버스들이 푸진 엉덩이를 흔들며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거나, 바람 부는 특유의 쉴새없는 푸른 반짝임 속으로 끊임없이 후퇴하는 도로 위를 달렸다. 나는 숨막히는 아치 지붕 아래의 차가운 기둥 사이, 보초병 근무소의 금속 창살 근처에 서서 너를 기다렸다. 어디나 사람들 천지였다. 하나같이 수염이 부숭부숭한 턱을  하고 서류가방 하나를 아래에 베를린의 점원들이, 속에 담배라도 피운 흐릿한 어지럼증이 가득한 눈빛으로 사무실을 나와 사납고 지친 눈빛으로 먹인 옷깃을 잔뜩 세운 끝없이 스쳐갔다. 빨간 밀짚모자를 쓰고 쥐색 카라쿨 모직의 코트를 입은 여자가 지나갔다. 그리고 무릎 아래에서 단추를 채우는 벨벳 바지를 입은 소년 하나, 그러고도 사람이 앞을 지나갔다.


나는 구석 기둥의 서늘한 그림자에 서서 지팡이에 기대어 너를 기다렸다. 네가 영영 오지 않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보초소 근처 기둥 옆에는 엽서, 지도, 부채처럼 접게 되어 있는 총천연색 사진 같은 것을 파는 노점이 하나 있었는데, 노점 옆에 놓인 등받이 없는 의자 위에, 다리가 짧고 통통하고 주근깨 박힌 둥근 얼굴을 갈색의 조그만 노파 하나가 앉아 있었고, 그녀 또한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노파와 누가 오래 기다릴 것이며, 손님과 누가 먼저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노파의 얼굴은 마치, “나는 그냥 여기 앉아 있는 뿐이야, 그냥 잠시 쉬고 있는 거지. 옆에 뭔가 신기한 것들을 잔뜩 늘어놓고 파는 노점 같은 것이 있긴 하지만, 그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네,” 하고 말하고 있는 같았다.


보초소를 돌아 기둥 사이를 지나는 인파는 끊이지 않았고, 몇은 엽서 무더기를 흘끗거리기도 했다. 그런 행인이 있으면 노파는 신경을 그에게 집중하고, “사라, 어서 ,” 하고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시선을 그에게 고정시켰다. 하지만 행인은 천연색 엽서와 흑백 사진들을 재빨리 훑어보고는 계속 걸음을 옮겼고, 노파는 태연한 다시 고개를 숙여 무릎 위에 놓인 빨간 책으로 눈을 돌렸다.


네가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줄담배를 피우고 아치 너머 거리 끝의 끼끗한 광장 쪽을 살피며  전에 없이 너를 기다렸다. 이따금 구석으로 잠시 후퇴해,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네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내가 보지 않는 사이에 다가오고 있을 것이라고, 만일 이번에 저쪽으로 고개를 다시 돌리면 너의 해달 모피 코트와 모자 창에 드리워 너의 눈을 가리는 까만 레이스가 눈에 들어올 거라고 상상해 보았다. 그러면서 나는 일부러 그쪽으로는 눈길을 주지 않았고, 자기기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새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