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
나는 이 스튜디오를 어떤 사진작가에게서 넘겨받았다. 그때까지도 벽 옆에는, 난간의 일부와 부유스름한 단지 하나를 담은 라일락 빛깔의 캔버스가 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구아슈 차원으로 넘어가는 문턱에서 서성이기라도 하는 듯, 고리버들 의자에 하냥 앉아 아침이 되도록 네 생각을 했다. 날이 밝을 무렵에는 공기가 무척이나 차가워졌다. 대충 빚어낸 점토 두상들이 서서히 어둠 속에서 먼지가 부옇게 이는 희미한 빛 속으로 떠올랐다. 그 두상들 중 하나, 그러니까 너를 닮게 빚어낸 것은 젖은 헝겊으로 싸여 있었다. 나는 천천히, 발 밑에서 무언가 밟혀 아스라지는 것을 느끼며 그 희미한 방을 건너가, 긴 장대 끝으로 경사진 창문에 찢어진 문장처럼 너덜거리는 검은 커튼들을 차례로 열어젖혔다. 잔뜩 얼굴을 찌푸린 도망자 같은 몰골의 아침을 안으로 맞아들이고 나는 문득 이유도 모른 채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그 이유란 것은 어쩌면 그저 내가 쓰레기와 파리에서 온 석고 파편들, 그리고 굳어진 석고 가루가 흩날리는 먼지 속에 하냥 앉아 너를 생각하며 고리버들 안락의자에서 하룻밤을 꼬박 지새웠기 때문이었을는지도 모른다.
내 귓전에 너의 이름이 들릴 때마다 나는 어떤 특별한 감각을 느꼈다. 칠흑의 번개와도 같은, 향기롭고도 강압적인 어떤 움직임 같은 것. 너는 베일을 고쳐 쓸 때마다 꼭 그렇게 팔을 움직이곤 했다. 나는 이유도 모른 채 너를 오래 사랑했다. 너의 방식이란 것은 늘 조야한 속임수에 불과했고, 너는 사실 늘 나태한 우울 속에 살고 있을 뿐이었는데도.
네 침대 옆에서 나는 빈 성냥갑 하나를 보았었다. 그 위에는 화장의 장례식을 마친 재가 소복이 쌓여 있었고, 투박하고 사내 같은 금빛 담배꽁초 하나가 있었다. 나는 너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너는 불쾌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너는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모든 것을 용서하며 너의 무릎을 끌어안고 촉촉하게 젖어드는 속눈썹을 검은 비단의 따뜻함 속에 파묻었다. 그 후로 나는 너를 두 주 동안 보지 못했다.
산들바람 속에 가을 아침이 반짝였다. 나는 조심스레 커튼 여는 장대를 한 구석에 기대어 놓았다. 창문의 넓은 광각 너머로 베를린의 기와지붕들이 보였고, 그 지붕들의 윤곽은 유리 안쪽의 무지갯빛 굴곡으로 인해 굽고 휘어 보였다. 수많은 기와 가운데 원형 지붕 하나가 청동 수박처럼 저 멀리 솟아 있었다. 구름은 뭉치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그 너머의 창백하고 얇은 푸른빛 가을하늘을 감질나게 드러냈다.
하루 전 나는 너와 통화를 했었다. 백기를 들고 먼저 전화를 건 것은 아무래도 나였다. 우리는 오늘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만나기로 했었다. 벌떼가 웅웅거리는 듯한 소음 너머로 들리는 너의 목소리는 먼 곳에서 울려오는 듯 했고 불안감에 차 있었다. 음성이 자꾸 먼 곳으로 미끄러져 달아나며 사라지는 것 같았다. 통화하는 동안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있었고, 울음을 애써 참아야 했다. 너에 대한 내 사랑은 늘, 박동하며 고여오는 눈물의 온기였다. 침묵과 눈물, 네 무릎을 덮은 따뜻한 비단이 내가 상상하는 천국의 전부였다. 이 모든 것을 너는 이해하지 못했다.
저녁을 먹고 너를 만나기 위해 나갔을 때는, 신선한 공기와 급류처럼 내려오는 노르스름한 햇살 덕에 머릿속이 온통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햇살이 한 줄기 한 줄기 관자놀이에 메아리쳤다. 커다란 적갈색의 낙엽들이 길을 따라 경주하듯 버석대며 헤엄쳐갔다.
나는 길을 걸으며, 아마 네가 약속장소에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네가 만일 나온다 해도 우리는 또 싸우고 말 것이 분명하다고. 나는 조각하고 사랑하는 일밖에는 알지 못했다. 그것이 너에게는 충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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