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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정기 연재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은총> 3 (계속) 찬 바람 한 줄기가 휭하니 스쳐갔다. 노파는 일어서서, 엽서들을 각각의 칸 속에 더 단단히 밀어넣기 시작했다. 그녀의 외투는 벨루어 원단으로 된 것으로, 허리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밤색 치마는 뒷부분보다 앞부분이 더 높이 추켜 올라가 있었고, 그래서 그녀는 걸음을 뗄 때마다 마치 배를 앞으로 한껏 내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녀의 작고 둥근 모자에 저항 없이 순순히 구겨져 부드러운 주름이 잡혀 있는 것과, 즈크 직의 끈 묶는 구두를 눈여겨보았다. 노파는 바지런히 가판대를 다시 정돈하는 중이었다. 그녀가 읽던 책은 (그것은 베를린 여행 소책자인 것으로 밝혀졌다) 의자 위에 놓여 있었는데, 가을바람이 무심히 페이지를 잔뜩 넘겨, 안에 차곡차곡 접혀 있던 지도를 계단처럼 펴 내려뜨려 놓았다... 더보기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은총> 2 (계속) 거대한 문들이 보였다. 버스들이 푸진 엉덩이를 흔들며 그 문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거나, 바람 부는 날 특유의 쉴새없는 푸른 반짝임 속으로 끊임없이 후퇴하는 도로 위를 달렸다. 나는 숨막히는 아치 지붕 아래의 차가운 기둥 사이, 보초병 근무소의 금속 창살 근처에 서서 너를 기다렸다. 어디나 사람들 천지였다. 하나같이 수염이 부숭부숭한 턱을 하고 서류가방 하나를 팔 아래에 낀 베를린의 점원들이, 빈 속에 담배라도 피운 듯 흐릿한 어지럼증이 가득한 눈빛으로 사무실을 나와 사납고 지친 눈빛으로 풀 먹인 옷깃을 잔뜩 세운 채 끝없이 스쳐갔다. 빨간 밀짚모자를 쓰고 쥐색 카라쿨 모직의 코트를 입은 여자가 지나갔다. 그리고 무릎 아래에서 단추를 채우는 벨벳 바지를 입은 소년 하나, 그러고도 몇 사람이 더 내.. 더보기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은총> 1 은총 나는 이 스튜디오를 어떤 사진작가에게서 넘겨받았다. 그때까지도 벽 옆에는, 난간의 일부와 부유스름한 단지 하나를 담은 라일락 빛깔의 캔버스가 서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구아슈 차원으로 넘어가는 문턱에서 서성이기라도 하는 듯, 고리버들 의자에 하냥 앉아 아침이 되도록 네 생각을 했다. 날이 밝을 무렵에는 공기가 무척이나 차가워졌다. 대충 빚어낸 점토 두상들이 서서히 어둠 속에서 먼지가 부옇게 이는 희미한 빛 속으로 떠올랐다. 그 두상들 중 하나, 그러니까 너를 닮게 빚어낸 것은 젖은 헝겊으로 싸여 있었다. 나는 천천히, 발 밑에서 무언가 밟혀 아스라지는 것을 느끼며 그 희미한 방을 건너가, 긴 장대 끝으로 경사진 창문에 찢어진 문장처럼 너덜거리는 검은 커튼들을 차례로 열어젖혔다. 잔뜩 얼굴을 찌푸린..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