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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배설>/노랑가방

조금 늦은 자기소개

운명을 믿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절대자가 정해준 필연적인 길을 논하는 데에 있어서 나는 회의적이다. 그 길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도 그럴 뿐더러, 설령 그 길이 있다고 하면 또 어쩔 것인가. 닿을 수 없는 신의 권능에 대해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질문에 답변하자면, 나는 운명을 믿지 않는 사람에 가깝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분명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태초에는 그저 우연에 불과했던 일들도, 자꾸 겹치고 꼬이다 보면 어느 새 풀어볼 수 없는 필연이 된다. 그것은 인간의 손에 달린 문제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손으로 해결해낼 수 없는 문제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바로 그런 지점에 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사랑하고 어쩔 수 없이 미워하며 어쩔 수 없이 살아가고 어쩔 수 없이 죽어간다. 그 속에서 느끼는 절망의 골을 메우기 위해 우리는 서로에게 손을 뻗친다. 문학은 그 무력하면서도 다정한 손짓을 글의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대답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말을 거는 그 행위를 나는 사랑한다. 신형철의 표현처럼, 자부도 체념도 없이 말하거니와 읽고 쓰는 일은 거의 내 전부이다. 오래 읽고 오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물론 내가 무능력하고 모자란 사람임을 안다. 어쩌겠는가. 그저, 더 많이 쓸 수 밖에. 항상 살풀이하듯 글을 쓰지만 쓰고 나면 더 큰 살이 낀 듯한 기분이 든다. 평생을 두고 쓰라는 뜻으로 알아듣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