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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배설>/노랑가방

우리이되, 우리가 아닌 - 홍상수의 <우리 선희>

우리이되, 우리가 아닌

홍상수의 <우리 선희> 

 

 

1. 서론

  여섯 번째 작품 <극장전>까지, 남녀의 성적 결합은 홍상수의 영화에서 가장 큰 화두였다. 여자는 남자의 구원인 듯 그려졌고, 구원을 향한 구체적인 방법은 섹스를 통해 모색되었다. 홍상수의 영화에 있어 여성성은 환상의 형태이며 주체에게는 끊임없는 결여의 대상이었다. 그 결과가 성공적이든 그렇지 않든, 주인공들은 이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해 스크린 속에서 서로의 육체를 갈구하고는 했다.

  그러나 일곱 번째 작품인 <해변의 여인>부터 그의 영화는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그의 영화에서는 섹스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말이 대신 채운다. 물론 섹스라는 개념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으나 이는 다만 인물의 대사나 행동으로 암시될 뿐이다. 구체적인 정사 장면은 생략된다. 이제 그의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말을 통해 여성성을 얻고자 한다.

  그렇다면 말은, 기존에 구원의 방법으로 여겨지던 섹스를 대체할 수 있을만큼 큰 힘을 가지고 있는가? 그의 열다섯 번째 작품 <우리 선희>는 이 문제에 천착하는 영화다. '말'이라는 개념과 완전히 무관한 인간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영화 속 말을 다루는 이들은 사실은 현실 속 우리의 모습과 흡사하다. 그러나 그는 전형적인 인간의 모습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도, 결코 이에 가까이 다가가지는 않는다. 즉 '우리'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들이 '우리'가 아닌 타인인 양 거리를 두는 것이다. 이에 본 글에서는 '우리이되, 우리가 아닌'이라는 제목 하에 <우리 선희> 속 홍상수의 전형적 인간상과 이에 대한 거리두기를 다루고자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말이 어떠한 형태로 정의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우리의 이야기

  평론가 신형철은 홍상수를 논하며 '홍상수는 전형적인 인간을 다룬다. 원형은 과장된 것처럼 보이고 전형은 쇄말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욕망의 진실은 원형에도 있고 전형에도 있을 것이다'라 말한 바 있다. 그의 평대로 홍상수가 화면에 담는 것은 언제나 전형적인 인간상이다. 그들을 통해 그는 인간 보편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홍상수의 여타 영화처럼, <우리 선희> 속 인물들은 반복과 변주를 통해 그들이 지닌 전형성을 강조한다. <우리 선희> 속에서는 같은 소품, 같은 대사, 같은 구도가 그리 많지 않은 등장인물들을 통해 되풀이된다. 인물들은 '아리랑'이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모였다 흩어지며, 그 속에서 이전에 제시된 듯한 장면이 다른 듯 비슷한 듯 다시 재현된다. 이러한 반복과 변주는 홍상수식 유머의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도 눈에 띄지만, 그에 앞서 인물들의 전형성을 강화해준다는 점에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같은 공간 속에서 같은 소품을 가지고 같은 행위를 하며 같은 대사를 뱉음으로써 그들 내부의 공통적 특질을 형성하고, 이는 나아가 인간 일반의 공통적 특질로 확장된다.

  그렇다면 <우리 선희> 속 전형적 인간상이 내포하는 욕망의 진실은 무엇인가? <우리 선희>는 추천서라는 소재를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추천서는 타인의 시선으로 본 나의 모습을 언어의 형태로 재현한다는 점에서, '말'을 논하는 데에 있어 가장 적절한 대상이다. 우리는 영화 속 추천서를 얻으러 다니는 선희처럼, 타인으로부터 언어로 정의되고 이를 인정받기 위한 욕망에 끊임없이 몸부림친다. 선희는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묻는다. "제가 정말 그래요? 제가 정말 그런 사람이에요?" 이는 선희의 질문인 동시에, 실은 우리가 평생을 두고 알기를 욕망하는 물음이다.

  이에 선희를 욕망하는 이들이 그 물음에 응답한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말을 주워섬기는 것 또한 우리의 삶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전형적인 풍경이다. 그들은 "한 우물만 파. 끝까지 부딪혀봐야 자기 한계를 알고 자기가 누군지 아는 거지."라고 얘기하지만, 정작 그 말을 실천하는 인물은 한 명도 없고, 모두들 타인의 말을 빌려 선희를 붙잡으려 할 뿐이다. 그들의 욕망이 전형적이니 그들의 말도 전형적일 수밖에 없다. 결국 똑같은 말은 뿌리를 잃고 그들 사이를 끊임없이 옮겨 다닌다.

  여기에서 우리는 말의 무력성을 확인할 수 있다. 영화 초반 선희는 사소한 거짓말을 한 상우에게 "선생님 있는데 선생님 없다면서요"라며 따지는데, 이 말은 영화 후반 추천서에 쓴 말을 번복하는 최 교수에게 "용기 없다고 썼는데 저 용기 있다면서요"라고 변주되어 돌아간다. 이에 대한 상우와 최 교수의 반응은 대수롭지 않다. 상우는 그것이 '농담'이었다 말하고, 최 교수는 "(지금 말하는)이게 진짜야. (느낌은)생각할수록 달라지잖아"라 이야기한다. 결국 말의 내용은 순간을 지나는 순간 무력해진다. 정말 남는 것은 말의 내용이 아닌 그 궤적과 방향성이다. 그들이 욕망한 순간 그것을 얻기 위해 누구에게 말을 걸었는지만이, 영화 속에서는 대체로 선희를 향하는 그 방향만이 남는 것이다.

 

3. 우리가 아닌 이야기

  그러나 우리가 그토록 집착하는 말이 실은 얼마나 무력한지를 이야기하면서도, <우리 선희>는 허무함이나 슬픔과 같은 느낌의 층위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선희>는 즐거운 영화에 가깝다. 이는 인물들이 가진 전형성에 우리가 쉽게 이입‧동화되지 않도록 하는 홍상수의 노력에 기인한 것일 터이다. 그는 그의 인물들과 철저히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우리가 그들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이를 초연한 자세로 대할 수 있도록 한다. <우리 선희>에서, 그는 이를 위해 크게 세 가지 방법을 이용한다.

3.1. 구도

  시점숏은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을 시점숏의 주인공과 동일시하여 그와 감정을 공유하게 하는 효과를 준다. 그러나 <우리 선희>는 홍상수의 작품들 대개가 그러하듯 시점숏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에 <우리 선희>에서는 씬에 등장하는 인물 전부를 화면에 등장시키는, 연극과 같은 구도를 사용한다. 이는 몽타주에 의한 정서 표현을 가능한 한 배제시켜 관객이 객관적인 입장에 설 수 있도록 돕는다. 관객들은 선희나 세 남자 중 누구 한 편에 서서 감정을 이입하지 않고, 다만 롱테이크로 찍은 그들의 술자리를 한 발 떨어져 지켜보며 관찰자의 태도를 취할 뿐이다.

  이러한 구도를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줌인아웃은, 관객들이 극 중 인물과 거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또 하나의 의도적 장치다. 홍상수는 인물이 얘기하는 중간에 갑작스럽게 고정된 카메라로 줌인이나 줌아웃을 시도한다.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인물들의 모습이 확대되거나 축소되는 것이다. 이는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불러일으켜 관객이 인물들의 전형성에 동화되지 않도록 도움을 준다.

3.2. 음악

  한편, 최은진이 부른 노래 <고향>은 <우리 선희> 속 인물들이 말을 잃어버린 상태에 처할 때마다 느닷없이 흘러나온다. 영화 속에 삽입되는 배경음악이야 여타 영화에서도 흔한 것이지만,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음악에 <우리 선희> 속의 인물들이 반응한다는 것이다. 음악이 흐르면 인물들은 영화 속 세계에 존재하던 시선을 돌려 프레임 밖 어딘가를 쳐다본다. 이에 관객들 역시 인물의 시선을 따라 역시 영화 너머의 어딘가로 주의를 돌리게 된다.

  말의 무력성을 확인하는 순간, 홍상수는 관객에게 슬픔을 느낄 만한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다. 대신 그는 영화 밖 공간을 상정함으로써 관객들이 그들의 위치를 상기하고 등장인물들과의 거리를 재확인할 수 있도록 돕는다. 기자 김혜리는 이 노래를 두고 '우리는,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로써 소유했다는 환상을 연주의 대가로 받으며 이 집 저 집 세레나데를 부르고 다니며 고향 없이 평생을 보내는지도 모른다. 사는 게 어장관리이고 풍각이다. 조금 쓸쓸하긴 해도 슬플 것까지야.'라고 감상을 밝힌 바 있다. 이 느닷없는 배경음악의 삽입과 이에 대한 인물들의 반응은, 이처럼 관객들로 하여금 조금 쓸쓸하긴 해도 슬플 것까지야 없다는 초연한 태도를 갖게 한다.

3.3. 풍경 삽입

  <우리 선희> 속에서는 나뭇잎이나 햇살만을 잡은 화면이 장면과 장면 사이에 총 네 번 삽입된다. 이는 장면 사 이에 '핫썬치킨'이나 '아리랑' 등의 간판을 클로즈업하여 보여주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후자는 공간적 배경을 빠른 시간 내에 설명해주려는 명백한 의도를 가진 화면인 반면, 전자는 이야기의 진행과는 무관한 잉여적인 화면이기 때문이다.

  영화와 관련없는 화면을 삽입함으로써, 관객들은 집중하여 보던 영화 속 세계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틈을 가진다. 이 시간 동안 관객들은 숨을 고르고, 지금껏 관찰한 세계가 자신이 실재하는 세계와는 구분된다는 사실을 확인받는다.

  아울러 이러한 풍경 화면의 삽입을 통해 홍상수는 관객들에게 인간의 전형성에서 초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영화 속의 인물들이 울든 웃든, 괴로워하든 즐거워하든 개의치 않고 나뭇잎은 흔들리며 햇살은 내리쬔다. 인물들이 집착하던 그 모든 것이, 실은 그리 대수롭지 않은 희극적인 사건들인 셈이다. 홍상수는 종종 자연물을 화면의 주인공으로 배치함으로써 이러한 일종의 달관자와 같은 의식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4. 결론

  홍상수가 전형성에 천착하는 많지 않은 감독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영화가 다루는 대부분의 주제는 결국 인간 보편의 것으로 귀결됨을 생각해볼 때, 인간의 전형성을 다룬다고만 해서 그것이 홍상수의 정체성을 온전히 나타낸다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홍상수의 진정한 미덕은 전형성을 전형적이지 않은 영화 문법으로 다룬다는 데에 있다. 그는 여타의 영화들처럼 작품 속 인물에 관객들을 동화시키려 애쓰지 않는다. 그는 관객들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데에 주력하지 않고, 그저 현실의 단면을 가져다놓은 듯한 영화 속 세계를 관객들이 관조하게끔 한다. 섹스에 대해 다룰 때든 말에 대해 다룰 때든, 극 중 인물들이 욕망하는 바를 얻었을 때든 얻지 못했을 때든 그의 영화가 매력적인 것은 바로 그 독특한 문법에 기인한 것일 터이다.

  <우리 선희> 속에서 말들은 궤적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말을 다루는 이들은 욕망을 아예 성취하지 못하거나 혹은 불완전하게 성취한다. 충고의 말도 정의의 말도 모두 무력한 언어로 스러질 뿐이다. 그러나 극 중 인물이 아닌 감독 홍상수가 하고자 하는 말은, <우리 선희> 속에서 단언컨대 성공적으로 전달된다. 홍상수는 말하는 법을 아는 감독이다. 말의 무력함에 대해 논하는 그의 말이, 슬픔의 감정 따위를 끌어오지 않고도 돌올하게 돋아 우리를 서늘하게 한다. 다시 홍상수에 대한 신형철의 말을 빌리자면 이러하다. ‘나는 그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이 상투적인 말을 딱 한 번 진심을 다해 하려고 한다. 이런 예술가들과 동시대를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진심으로 말하건대, 정말로 그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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