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배설>/노랑가방 썸네일형 리스트형 배설이 죽었슴다--; * 쓰기 전, 제목에 대하여 1월 주제 'if all else fail'에 맞추어 쓰는 죽음에 대한 짧은 글이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문장을 제목으로 삼았다. 가벼워 보일수록 좋다. 어디선가, 죽은 후의 사람은 근육에 힘을 줄 수 없기 때문에 사체의 온갖 구멍으로 배설물이 흘러나온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나는 아직까지 시신을 직접 본 적이 없으므로 이 도시괴담 같은 이야기의 진위 여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시신을 수습할 때 귓구멍이며 콧구멍 같은 데에 솜을 틀어막는 것을 생각해보면, 물론 오래 전 영혼이 빠져나갈까 하는 생각에서 비롯된 관습적인 행위일 수도 있겠지마는, 이 배설물 이야기도 아주 타당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리라 생각된다. 게다가, 배설물이 어떻게든 체외로 나.. 더보기 조금 늦은 자기소개 운명을 믿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절대자가 정해준 필연적인 길을 논하는 데에 있어서 나는 회의적이다. 그 길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도 그럴 뿐더러, 설령 그 길이 있다고 하면 또 어쩔 것인가. 닿을 수 없는 신의 권능에 대해 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질문에 답변하자면, 나는 운명을 믿지 않는 사람에 가깝다.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분명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태초에는 그저 우연에 불과했던 일들도, 자꾸 겹치고 꼬이다 보면 어느 새 풀어볼 수 없는 필연이 된다. 그것은 인간의 손에 달린 문제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손으로 해결해낼 수 없는 문제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바로 그런 지점에 있다.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사랑하고 어쩔 수 없이 미워하며 어쩔 수 없이 살아가고 어쩔 수 없.. 더보기 이국의 밤 - 시간이 이상해졌다 이국의 밤 - 시간이 이상해졌다 낮에는 국적 불명의 사람들로 북적이던 게스트하우스의 거실도, 새벽 두 시를 넘기자 조용해졌다. 텔레비전에서는 흑인들의 체조 경기가 방영되고 있었으나 아무도 보는 사람은 없었다. 식탁에서는 한 명의 동양인과 두 명의 서양인이 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일본어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대화 소리는 조금 커지는가 싶다가도 시간대를 의식한 탓인지 다시 작아졌다. 나는 소파에 혼자 웅크려 앉아있었다.어제는 내 생일이었다. 이국에서 생일을 보내게 되리라고는 꿈도 꿔본 적 없었지만, 비행기 값이 싼 날을 찾아 귀국 일정을 짜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혼자 여행을 왔으므로 곁에서 육성으로 축하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오코노미야키를 먹고, 관람차를 타고, 도톤보리 거리를 둘러보면서 간간히 .. 더보기 우리이되, 우리가 아닌 - 홍상수의 <우리 선희> 우리이되, 우리가 아닌 홍상수의 1. 서론 여섯 번째 작품 까지, 남녀의 성적 결합은 홍상수의 영화에서 가장 큰 화두였다. 여자는 남자의 구원인 듯 그려졌고, 구원을 향한 구체적인 방법은 섹스를 통해 모색되었다. 홍상수의 영화에 있어 여성성은 환상의 형태이며 주체에게는 끊임없는 결여의 대상이었다. 그 결과가 성공적이든 그렇지 않든, 주인공들은 이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위해 스크린 속에서 서로의 육체를 갈구하고는 했다. 그러나 일곱 번째 작품인 부터 그의 영화는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그의 영화에서는 섹스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말이 대신 채운다. 물론 섹스라는 개념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으나 이는 다만 인물의 대사나 행동으로 암시될 뿐이다. 구체적인 정사 장면은 생략된다. 이제 그의 .. 더보기 '그림자와 이별하기'의 일부 K가 불쑥 말했다. 영국에 살았었다. 어릴 때? 어. 영국은 비가 자주 오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냥 방에 있었어. 여기까지 말하고 K는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애의 콧등이 찌푸려졌다가 펴졌다가, 또 주름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가만히 걸었다. K의 새치가 가로등 밑을 지날 때마다 반짝거렸다. 영국에 살던 시절에도 K에게 새치가 있었을까. 왠지 그랬을 것 같았다. 영국 골방에서 비오는 날마다 외로워하는, 새치가 난 꼬마 K를 상상해보았다. 웃음이 났다. 왜 웃냐. 어렸을 때도 새치가 있었어? 그럴 리가 없잖아. 어릴 때의 나는 그냥 어린 나로 봐줘라. 그렇게 말하면서 K도 웃었다. 영국에서는 비틀즈를 들었어. 또 블러라던가, 아무튼 여러 밴드 음악을 들었다. 지금도 좋아하잖아. 그 때 만들어진 .. 더보기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