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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배설>/작희

#4 육체여 안녕: <사형장으로부터의 초대>와 영지주의의 관점에서 1

편집장이 쪼기 전에 10월호 글을 미리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은 미리 쓴다기보다는 예전에 수업시간에 썼던 글을 번역 및 수정하고, 책을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배경지식 설명을 앞머리에 많이 덧붙인 것입니다. 10월호의 주제는 '이별'인데, 보다 원론적인 이별을 논할까 합니다.



2013년 5월 9일 영어로 씀
본 블로그에 발행 날짜는 번역된 시점과 일치함


육체여 안녕: <사형장으로부터의 초대>와 영지주의의 관점에서

(원제: Beheading as the Negation of Bodily Presence:
Invitation to a Beheading as a Gnostic Allegory to the Negation of the Physical)


~ 에두아르도 가르씨아 베니토의 1938년 스케치, 샤넬을 위한.


글을 쓸 수 있다면 나보코프처럼 쓰고 싶습니다. 이민자 중 영어를 완전히 자기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게 되었던 작가가 있다면 아마 콘래드와 나보코프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요. 제 친구들 중에는 콘래드파/ 나보코프파로 완전히 갈라선 친구들이 적잖이 있습니다. 극단적 리얼리즘과 치밀한 심리묘사를 사랑하는 이들은 대개 콘래드를 좋아합니다. 학교 방송 Entitled Opinions를 진행하는 해리슨 교수는, 나보코프가 천재인 것은 알겠지만, 그렇게 자기 자신의 천재성을 의식하고 공작새처럼 한껏 기량을 펼쳐 보이며 글을 쓰는 사람은 좀 별로인 것 같다고 말한 적도 있는데요. 무슨 말인지 매우 공감이 잘 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나보코프파입니다. 

<사형장으로의 초대>는 러시아어로 쓰였고, 나보코프 본인이 다른 전문 번역가 한 명과 함께 영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니까 영역된 <초대>는 a translation이 아니라 the translation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번역 얘기가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이 한국어 제목은 조금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Beheading이 왜 사형장이 된 걸까요? 참수형으로의 초대 정도가 살짝 번역투기는 해도 더 적절하지 않았을까요. )

각설하고, 이 포스팅에서는 <사형장으로부터의 초대>에 나타난 영지주의 모티프를 살펴보고, 참수형이라는 모티프가 어떻게 육체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에 대한 거부의 상징이 되는지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소설의 주인공 신시나투스는 (신시나투스는 라틴어로 구불구불한, 이라는 뜻이라고 하더군요) 일종의 전체주의 사회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사회의 특징은, 그 사회에 속한 모든 사람의 생각은, 그 어떤 관찰자에게도 꿰뚫어보듯 환히 보인다는 것입니다. A라는 사람이 B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A를 보고 있는 A2, A3, A4의 사람은 모두 A라는 사람이 B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나라 감옥에 수감된 사람이 따라야 하는 규칙 중에는, 성적인 꿈 꾸지 않기 같은 조항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생각이 투명한 사회'라는 거죠.

생각이 투명하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나보코프는 밝혀 쓰지 않았습니다만, 몇 가지 추론을 해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 가능성은 일단, A, A2, A3, A4 ... An이라는 사람이 모두 B라는 생각만을 한다는 겁니다. 모두의 생각이 동일할 때, 그리고 개인과 개인 간의 구분이 없을 만큼 획일화된 인간으로만 사회가 구성될 때 그 사회는 사고가 투명한 사회가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마도 극단적인 전체주의 사회라고 할 수 있는 개미 사회는 사고가 투명한 사회일 겁니다.) 두 번째는, 사고가 투명한 사회에서는 정신적인 깊이에서까지의 컨트롤이 이루어질 거라는 점입니다. 1984의 윈스턴은 사형집행 직전 뼛속까지 세뇌당하는 일련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 국가는 개인이 표면적으로 보이는 행동의 패턴뿐 아니라 정신까지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죠. (북한 김씨 정권의 꿈은 아마도 자신들을 제외한 인민의 생각이 모두 투명해지는 것이겠지요. 누가 반동분자인지 적출해내는 일이 1500배쯤 쉬워질 테니 말입니다.)

소설은, 주인공 신시나투스가 거대한 요새처럼 생긴 감옥에 구금되고, 공식적으로 사형선고를 받게 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신시나투스의 죄명은 참으로 애매모호합니다. "gnostical turpitude"가 바로 그의 죄목인데, 번역하자면 '지식에 관한 배덕'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turpitude란 여러 국가의 법률에서 쓰이는 말인데, 주요하게는 moral turpitude라는 구절로 쓰입니다. 공동체의 규범에 비추어 보았을 때 탈선적이고 비양심적인 마음의 상태를 가진 것을 moral turpitude라고 합니다. 위키피디아를 찾아보니 19세기 초부터 미국 이민법에서 쓰이기 시작한 말이라고 하네요. 이민 부적격자를 가리기 위한 조건 중 하나는, 과거에 moral turpitude에 기인한 범죄를 저지른 적이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민자였던 나보코프 역시 이 용어를 아마 알고 있었으리라고 생각되고, 따라서 turpitude라는 조건에 (도덕적인 것이든 지식적인 것이든) 해당되는 사람은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그런 일련의 연상 작용을 모두 고려한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어쨌든, turpitude란 모종의 부적격입니다. 신시나투스가, '사고가 투명한 사회'에서 부적격자였던 이유는, 그는 불투명한 사고를 지닌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보코프는 언어유희 역시 굉장히 즐겼던 사람이니, turpitude라는 단어 선택은 발음이 비슷한 turbid--불투명한, 흐릿한--를 염두에 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식에 관한 배덕'은, 사람들이 외부에서 관찰하는 것으로는 그가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는 것이고, 모두의 사고가 투명한 사회에서 이 기묘한 특징은 위험요소로 여겨지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신시나투스의 체포 과정 역시 그 위험의 정도를 잘 반영합니다. 그는 사람이 많은 공공장소--광장 같은 곳--에 있었는데, '시민 여러분, 주의하십시오. 지금 우리 중에 ... 가 있습니다!'라는 안내방송과 함께 사이렌이 울려퍼지고,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대피한 후 (무슨 화학무기 테러리스트 용의자의 체포를 방불케 합니다), 신시나투스는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됩니다. 그에게 선고된 불투명한 사고의 댓가는 참수형입니다. 

(여기까지가 대략 배경지식 설명입니다.)


“What a misunderstanding” said Cincinnatus and suddenly burst out laughing. He stood up and took off the dressing gown, the skullcap, the slippers. He took of the linen trousers and the shirt. He took off his head like a toupee, took off his collarbones like shoulder straps, took off his rib cage like a hauberk. He took off his hips and his legs, he took off his arms like gauntlets and threw them in a corner. What was left of him gradually dissolved, hardly coloring the air. At first Cincinnatus simply reveled in the coolness; then, fully immersed in his secret medium, he began freely and happily to . . .

The iron thunderclap of the bolt resounded, and Cincinnatus instantly grew all that he had cast off, the skullcap included.

" 오해도 이런 오해가 없군." 신시나투스는 이렇게 말하고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일어서서 목욕가운, 모자, 그리고 슬리퍼를 모두 벗었다. 면마 재질의 바지와 셔츠 역시 벗어냈다. 그는 마치 가발을 벗듯 자기 자신의 머리를 떼어냈고, 어깨끈을 풀어내듯 쇄골을 벗어던졌고, 갑옷을 벗듯 양 갈비짝을 떼어냈다. 둔부와 다리를 떼어내고, 미늘장갑을 벗듯 팔을 떼어내어 구석에 던졌다. 그리고 그의 잔해는 서서히 공중으로,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분해되고 있었다. 처음에 신시나투는 그저 그 가뿐함을 마음껏 음미했고, 마침내 비밀스런 그 무언가에 완전히 용해된 채로 그는, 자유롭고 행복한 마음으로...

빗장의 철제 소음이 천둥처럼 울리는 순간, 그가 벗어 던졌던 그 모든 것이 (모자를 포함해서) 신시나투스의 몸에 다시 생겨났다.

~ pp. 32-3 (글쓴이 [작희]가 영역본으로부터 번역함)


turpitude에 대해 기나긴 서론을 썼는데, 여기서 진짜로 주목해야 하는 단어는 'gnostical'입니다. 불가지론자를 agnostic라고 하지요. gnost-는 '앎'을 뜻하는 희랍어 루트이고, gnosticism은 '영지주의'를 뜻하는 말입니다. gnostical은 그러니까, '지식에 대한'이라는 뜻도, '영지주의적'이라는 뜻도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영지주의 역시 여러 갈래가 있고, 영지주의라는 개념이 구체적으로 생겨나기 전에도 영지주의적 요소들은 여러 사상에 많이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영지주의가 본격적으로 정의되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 교리가 정립되기 시작하면서부터인데요, 왜 그런지는 조금만 읽어보시면 아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지주의자들에 따르면,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물질적 세계는 전적으로 무의미하며 또한 기만적입니다. (<초대>에서, 감옥의 관리인들은 지속적으로 겉모습을 바꾸며, 건물 역시 그 구조와 모양이, 원래 모습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울 만큼 자주 변합니다. 이처럼 물질의 외형은 우리를 속입니다.) '나'라는 존재 역시 영혼과 육체로 나뉘는데, 불멸의 영혼만이 '진짜' 존재이며, 그 영혼은 지금 구역질나는 육체의 감옥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펠레빈의 소설 오몬 라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오지요.)



~ (이미지 클릭!) Arcade Fire의, My Body Is a Cage[각주:1]


육체가 왜 구역질 나냐고요? 사람 몸이 사실 얼마나 거추장스럽고 불편합니까. 식욕 성욕 수면욕의 3욕구에, 배변욕은 말할 것도 없지요. 우리는 우리 몸을 참 사랑합니다만, 사실 불필요한 곳에서 흐르는 그 모든 액체와 불필요한 곳에 나 있는 모든 털과 불필요한 시점에 생겨나는 모든 부산물을 생각했을 때 육체란 참 좋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영지주의적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다빈치코드의 그 채찍 들고 다니던 사람 같은)은 예로부터 극단적인 금욕을 통해 육신적 삶을 억제했습니다. '육체로서의 존재'를 끊임없이 부정하고 부인할 때에만 그 속에 갇힌 영혼은 한층 독립적인 존재를 영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자기학대도 영혼을 '구원'에 이르게 하지는 못합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떤 '앎'을 얻어야 하는데, 그 '앎'은 신과 우주에 대한 절대적인 지식입니다. (모종의 '돈오'입니다. 불교적 열반의 냄새가 조금 나지 않습니까.) 영지주의 신앙에서 자기학대가 유익한 것은 자기학대를 아마도 그 '앎'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매개로 간주하기 때문이겠지요. 이 포스팅에서는 신시나투스를 영지주의적 구도자의 알레고리적 인물로 보고, <초대>에 나타난 영지주의적 모티프를 짚어 보기로 합니다.

일단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감옥'입니다. 아까 육체가 영혼의 감옥이며, 영혼은 육체의 죄수로 구금되어 있는 상태라고 했었지요. 감옥은 그에 대한 직접적인 은유입니다. 육체/ 영혼을 논할 때의 전제는 이원주의인데, 그 이원주의적 모티프 역시 소설 전반에 흩어져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육체의 죽음에 대한 영혼의 동요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신시나투스의 다음과 같은 대사가 있습니다. "말(馬)이 떠는 것은 기수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잖소. (16)" 신시나투스는 자신의 자아를, 자기가 타고 있는 말을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하는 기수에 비유합니다. 신시나투스는 이 소설에서 일종의 성인과 같은 인물입니다만 (조금 있다가 설명하겠지만), 그 역시 소설 초반에는 자신을 둘러싼 물질세계의 제약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책에서 전하고자 하는 최종적 메시지는 감옥 안과 밖의 세상이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이지만, 소설 초반의 신시나투스는 이 세상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닌 단지 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을 갈구하지요. 감옥 밖의 세상에 대한 그리움은, 아내인 마르테와의 추억이 담긴 타마라 가든에 대한 향수로도 나타납니다. 또, 곧 자신에게 닥쳐올, '사랑스러운 머리와의 이별' (참수형이지요)를 생각하며 그는 어둠 속에서 홀로 흐느끼기까지 합니다. 그는 자신의 머리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이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무척이나 공들여 만들어진 작품인데... 내 척추의 곡률은 정말 놀랍도록 정밀하게 계산되어 있는걸... 내 머리는 너무나도 편안하고...

And yet I have been fashioned so painstakingly … The curvature of my spine has been calculated so well, so mysteriously… My head is so comfortable… 

~ pp. 22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구원이, 육신으로 상징되는 물질세계로부터의 완전한 탈출로만 가능하다고 할 때, '머리'에 대한 신시나투스의 이러한 집착은 구원의 걸림돌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어깨 위에 너무나도 잘 올라앉아 있는 머리와의 이별을 거부하지요. 아직 그가 자유로워질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표증입니다.

아까 신시나투스는 이 소설에서 구도자, 성인과 같은 인물이라고 말했었지요 (소설에 대한 조금 더 정석적인 해설은, 주인공을 통속적 세계에서 살아가는 고독한 예술가의 표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는 언제나, '그가 뭔가를 알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 '뭔가'란, 그가 어린 시절에 더 잘 알고 있었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지요. 나보코프가 신시나투스의 죄목으로 'gnostical turpitude'를 지목했다는 점에서, 이 '앎'은 곧 영지주의적 '앎'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의 '앎'은 우주 전반에 대한 절대적 통찰이지요. 신시나투스는 그의 감옥 방에서 계속 뭔가를 써내려가고, 그 글을 쓰는 과정 속에서 그 '앎'에 도달하고 어린 시절의 '앎'의 상태로 회귀하려고 노력합니다. 무언가를 쓰는 행위가 영적인 구도의 행위라는 것은, 글쓰기에 대한 신시나투스의 태도에서 잘 드러납니다. 글 쓰는 일에 대해 그는, 자신이 "급수대에 달려 있는 컵처럼 그 책상에 매여 있으며, 그가 원하는 것을 얻기까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지요.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노문학의 맥락에서는, '쓴다'는 행위 자체에 영적인 지위를 부여하기도 합니다. 고골의 단편 '외투'의 아카키 아카키예비치 역시 중세 수도원의 수도승처럼 계속 뭔가 베끼는 일을 했었지요.) 이런 성인/구도자적 면모는 몇 가지 은유를 통해 더 강조되는데, 사형 집행대가 십자가를 닮았고 집행을 위해 신시나투스가 십자가 위의 예수처럼 팔을 벌려야 한다는 점, 그가 아버지 없이 어머니만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가 그를 면회 온 어머니를 외면한다는 점이 모두 그렇습니다.

이렇듯 영지주의적 성인으로 묘사되는 신시나투스가 육체적으로 매우 연약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영지주의에서는 육체와 영혼을 서로 상충되는 개념으로 놓으니까요). 물리적 세계에서 신시나투스의 존재는 매우 미약(feeble)하며, 바스락거리는 종잇장처럼 덧없(fleeting)습니다. 나보코프는 주인공의 외모를 소설 중반에 이르도록 묘사하지 않는데, 그 묘사를 읽는 독자는 살짝 의아한 기분이 들 것 같습니다. 신시나투스의 죄목이 '투명하지 않았던 것'임에 반해, 그의 외모는 그 연약함이 '한없이 투명에 가깝'습니다. 내레이터는 신시나투스가 '미완성'의 몸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제 신시나투스의 희소한 면모에 대해 묘사해 보도록 한다. 그의 살의 미완성성 ... 신시나투스의 얼굴은 투명하리만치 창백했고, 그의 움푹 패인 양 볼에는 솜털이 있었고, 그의 콧수염은 그 결이 너무나도 가늘고 보드라워 마치 헝클어진 햇살 한 줌이 그의 윗입술 위에 살폿 내려앉은 것 같았다. 그의 관자놀이에 난 투명한 머리털과, 채 다 그려지지 않은 것 같은 그의 입술의 윤곽과, 음영이 들어가지 않은 양 손과... 마치 나무의 머리채 같은 나뭇잎들이 그늘에서 환함으로 녹아 나가듯이, 신시나투스 역시도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쉽게 공기의 한 층을 따라, 아무도 모르는 그만의 퇴장로를 따라 사라져 가는 그림자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The subject will now be the precious quality of Cincinnatus; his fleshy incompleteness […] Cincinnatus’s face, grown transparently pallid, with fuzz on its sunken cheeks and a moustache with such a delicate hair texture that it seemed to be actually a bit of dishevelled sunlight on his upper lip […] the transparent hair on his temples […] the light outline of his lips, seemingly not quite fully drawn, […] not-yet-shaded-in hands, […] as all the complexity of a tree’s foliage passes from shade to radiance […] It seemed as if at any moment, […] Cincinnatus would step in such a way as to slip naturally and effortlessly through some chink of the air into its unknown coulisses to disappearing reflection …

~ pp. 120-1

신시나투스의 신체는 어딘가 미완성품적인 면모가 많습니다. 흡사, 화가가 깜박하고 음영을 더하지 않아 완전한 존재를 부여하지 못한 그림 속 인물 같지요. 그의 몸은 창백하니 채색이 되어 있지 않으며, 바스라질 듯이 연약하고, 윤곽이 뚜렷하지 못합니다. 윤곽이 너무도 흐릿하여 그를 둘러싼 대기 중으로 언제라도 녹아 사라질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나무를 점묘화로 그려 보신 분들은 위의 나뭇잎 비유를 잘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미완성의 몸은 육체로부터의 탈출을 조금 더 쉽게 해 주는 모종의 자질이며, 그 나라의 사람들이 신시나투스를 핍박하는 데에는 그 자유의 가능성도 한몫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신시나투스의 연약한 몸을 보고 보호본능을 느끼는 대신 '그 몸으로 대변되는, 현기증 날 정도로 놀라운 자유를 조각조각으로 찢고 썰어 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고 하니까요 (122페이지). 그가 자연스럽고 쉽게 다른 차원으로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은, 제가 본론으로 넘어올 때 삽입한 인용문 (신시나투스가 자기 몸의 여러 부분들을 옷조각처럼 벗어던지는 부분)과도 일맥상통합니다. 그 인용문에서 신시나투스는 만져질 수 없는 영역 (the freedom of impalpability)로 탈출을 시도하지요. 그 영역으로의 탈출이 '탈출'인 것은, 영혼은 오로지 그 영역에서만, 육체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몸을 벗어던지며 신시나투스는, 전에는 그가 그렇게도 사랑하던 머리마저도 망설임 없이 떼어냄으로써, 다가올 참수형에 대한 복선을 던짐과 동시에 육신으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를 잠깐이나마 만끽하는 것이지요.

(글이 너무 길어져서 허리를 잘랐습니다. 나머지 반은 다른 포스팅으로 쓰기로 합니다.)


  1. Image source: http://b.vimeocdn.com/ts/118/643/118643605_640.jpg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