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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연애 이야기/짝사랑에 실패하는 n가지 방법

검은 두루마기와 글

검은 두루마기와 글

엊그제 모 모임에서 나눈 대화 중, 제일 부럽다 여겨지는 사람이 누구냐 묻기에 나는 생각 없는 사람이 부럽다 하였는데, 아닌 것이 아니라 요즘 생각이 없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나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네 생각만 하기에도 일생이 부족할 것 같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아차 정신을 차리고는 할 일을 한동안 하고, 쉬고 싶을 때는 다시 입 안에 알사탕 하나 문 것을 하염없이 혀로 쓰다듬고 굴려 보듯이 머릿속으로 너와 네 목소리를 팽이처럼 돌려 본다. 좀 있다 다시 자기소개서를 쓰러 갈 적에는 -- 나 자신을 어떻게든 광고해서 어느 대학에라도 팔아야 할 것인데 그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 그 팽이를 다시 주워 호주머니에 넣을 것이다.

나는 아무래도 오늘 생리통으로 종일 앓을 모양이다. 짜증에도 생리통에도 잡념에도 네가 약이겠으나 오늘 나는 너를 만날 수 없다. 연애와 음주는 그런 점에서 닮았지만, 그나마 다른 점은 후자는 세 시간만 낭비하고자 맘을 먹어도 숙취며 속앓이로 삼 일쯤을 낭비하게 된다는 것이다. 너를 만나거나 생각하는 날은 적어도 속앓이도 두통도 없다. 너와 유등을 보고 온 날에는 그래도 이력서는 완성하였으니, 팽이를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호주머니에 보관하기를 수백 번쯤 더 반복하면 아마 자기소개서도 어떻게든 완성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다. 제일 좋은 건 너와 맥주 한 캔을 나눠 마시며 걷는 일이다.

아버지가 안도현의 백석 평전을 사다 주셨다. 네가 선물 가지고 싶은 게 있냐고 물었을 때 나는 딱히 없노라고 했는데 -- 그 많던 책 욕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고 단지 갖고 싶은 책이 너무 많을 뿐이며, 너는 개복치를 사 줄 생각은 없다고 하였으니 -- 이제 생각나는 것이 백석 정본 시집이다. 성탄절에 치즈가 많이 들어간 캐서롤 식의 뭔가를 먹고 싶고, 또 대학 졸업까지 해 놓고는 때 아닌 노망(로망!)으로 사슴 뿔이 달린 머리띠를 하고 걸어다니고 싶다 하였는데, 거기에 또 난데없이 식민지 시인의 시집이 끼게 되었다. 그 모든 서양식의 즐거움에, 두루마기를 걸치고 이마 가운데 가르마 -- 북에서는 가리마라 하더라마는 -- 를 단정히 낸 반도의 프로소디[韻律]라 -- .

새삼 백석 평전을 읽으며 네 생각을 하는 까닭은, 그 책에 실린 백석의 두루마기 이야기 때문이다. 백석이 만주로 가서 말단 관리로 일하던 시절 자야는 그에게 검은 두루마기 한 벌을 지어 보냈단다. 그것을 입고 다니는 백석을 보고 지인들이 서울의 金이 보낸 것이냐고 묻자 그는 대답을 않더란다.

그러나 내가 지을 수 있는 옷가지라고는 뜨개로 뜰 수 있는 것뿐이며, 그게 아니고서야 지어줄 수 있는 것이라곤 별 볼 일 없는 글 나부랑이뿐이다. 그나마 감사한 것은 네가 글 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내가 당분간 너에게 지어 줄 수 있는 전부 -- 기역과 니은과 아야어여에, 이따금 섞여드는 異國의 유기음을 얼기설기 엮은 시시껄렁한 무언가 -- 가 허섭스레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옷을 지었다는 것이, 꼭 자야 본인이 손수 물레를 돌리고 마름질을 하고 바늘을 놀려 옷 한 벌을 장만했다는 뜻은 아마 아닐 것이다. 허나 포목을 고르고, 옷 안에 둘 솜을 손바닥에 올려 보고, 매무새가 어떻게 되어가는지를 종종 살피고, 완성된 옷의 솔기가 튼튼한지 만져 보고, 옷을 고이 접어 심부름꾼 편이든 우편이든 보내기까지 그는 아마 애인을 생각하지 않았겠나, 싶다. 그래서 나도 팽이를 돌리며 글을 쓴다. 나중에 너와 나에게 시간이든 금전이든 여유가 생긴다면 네게 좋은 셔츠 한 벌쯤을 맞춰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