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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배설>/에이넉스

#1. 잉여인간 둘

잉여인간 둘


 앞으로 한국에서 뭐가 유행할 지 모르겠다면 일본의 10년 전을 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금 유행하는 게 10년 뒤에 한국에서 유행한다는 얘기다. 뭐 구체적으로 딱 '10년'은 아닐지언정, 일본에 유행하는 것들, 일어나는 현상들이 곧 한국에서도 보이게 될 것이란 얘기다. 


 처음엔 이게 무슨 지랄맞은 소리인가 하고 흘렸던 말이었는데, 이게 곱씹으면 곱씹을 수록 그럴듯한 얘기인 것 같다. 일례로, 나는 일본의 어떤 아이돌 그룹은 멤버가 '졸업'을 한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거 참 괴이쩍다는 생각만 했었다. 그땐 한국에서도 걸그룹이 대세가 되고, 졸업 시스템을 가진 아이돌이 우리나라에도 생길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또는 한창 스폰지가 대세이던 때, 일본에는 혼자 고기를 구워먹을 수 있는 고깃집이 있다거나, 혼자 밥먹는 사람을 위한 비디오 테이프가 있다거나 하는 얘기를 틀어주면 그저 비웃기만 했었다. 하지만 네이버 맛집 블로그들은 이제 '혼자서 밥먹기 좋은 강남역 맛집'들을 소개하고, 사람들은 인터넷 먹방을 찾아보게 되었다. 인터넷에는 '혼자 밥먹기 레벨표' 같은 것들도 돌아다니고. 실제로 나 역시도 다른 사람들과 밥먹는 것보다 혼자 밥먹는 빈도가 더 높으니. 

 이젠 한국에서 '오타쿠' 나 '히키코모리'류에 속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도 쉬워졌다.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에서 그 단어를 처음 들었었다. 이원복 교수는 게임을 일레로 들면서 신작 발매된 게임을 순식간에 깨버리고 개발자들도 모르는 버그를 찾아내는 오타쿠를 예로 들었었다. 아마 디아3를 4시간에 깨버린 류의 사람들도 같은 사람들일 것이다. 이틀만에 깨버린 나도 실상은 비슷한 류의 녀석일지도 모르고. 


 일본에서 한동안 얘기가 돌던 '니트' 역시 우리나라에 들어왔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어디서 본 바로는 니트를 단순히 실업자나 백수 등의 용어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한다더라. 실망실업자 같은 표현을 쓰기도 애매하고. 언론에서는 뭐 니트 대신에 캥거루족이란 표현을 쓰는 것 같다. 물론 진짜 한국의 니트들은 스스로를 니트라고 부르기 보다는 '잉여'라고 부르기를 더 자주하는 것 같다. 잉여는 니트(자발성 실업자)보다는 조금 더 넓은 표현이긴 하다만. 

 사실 '잉여'라는 개념/현상/문화를 지금와서 무엇인가 신선한 것인냥 다루기에는 시간이 조금 많이 지났다. 아마도 이 글을 읽고있는 당신 역시 어디선가 '잉여롭다'는 얘기 한번 쯤은 들어봤을 가능성이 높다. 잉여문화가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던 건 대충 2000년대 후반대였고, 그건 대충 5년쯤 전인 셈이다. 벌써 반십년 가까이 우리 사회에 퍼져있었단 얘기다.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잉여'라는 단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의 변화이다. 손창섭의 '잉여인간'이 그러하였듯, '인간 떨거지 되는거야!!'라는 말죽거리 잔혹사의 명대사가 그러하듯, 잉여인간, 또는 잉여라는 단어는 아주 부정적인 단어였다. 그런 느낌에서 나온 노래가 이런 노래였을 것이다. 


화나 - 잉여인간





 Fana, 혹은 화나의 2005년도 Brainstorming EP 수록곡. 화나가 소울컴퍼니를 탈퇴한 최초의 멤버인 것은(음악은 계속 하면서 솔컴만 탈퇴하는 - 칼날 등은 제외한다) 사실 그렇게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화나는 이때부터 이미 소울컴퍼니의 범위를 벗어난 음악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화나 역시 이때는 소위 말하는 '솔컴식 감성힙합'을 주로 했기에, 화나의 1집 Fanatic에서 Red Sun같은 음악이 나올줄은 몰랐을 것이다. 

  현실적이고 디테일한 '잉여인간의 삶'에 대한 자조적이고 비관적인 이야기. 이런 음산한 비트를 만들 생각을 한 더큐도, 이런 노래를 만들 생각을 한 화나 모두 정말 '선구자'라는 찬사가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부정적으로 묘사되던 '잉여'라는 단어는 몇년 지나지 않아 그 어기가 확 달라지게 되었다. 일본에서 자칭 니트들이 늘어났듯, 우리나라에는 자칭 '잉여'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잉여나, 잉여인간이라는 단어는 자조적인 탄식이면서도 어딘가 유머러스한 부분을 함유하게 되었다. 예전의 그 꿈도 희망도 없는 수준의 부정적인 느낌은 사라지게 된 셈이다. '잉여'라는 그것 자체를 즐기게 된 느낌이기도 하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이 쓸데없는 일이고, 정말 시간이 남아돌아야만 할 수 있는 일인건 알지만은, 그런것들이 모여서 모두가(다른 잉여가) 향유할만한 컨텐츠가 된다면 그 자체로도 꽤나 즐거운 일이라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어떤 컨텐츠를 딱히 생산해내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즐기는 것 자체는 죄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래 하나 더 투척. 


  



 정규 트랙도 아닌 skit에 불과한 트랙이지만, 잉여잉여한 노래 치고는 꽤나 노래가 좋아서 뇌리에 남았던 트랙이다. 잠이 약간 덜 깬듯한 Stella Jang의 목소리와, 대충 쓴 가사지만 라임은 딱딱 맞아가는 구성이 인상적이다. 오히려 앨범상에서는 그 뒤에 배치된 원래의 '잉여인간' 트랙이 약간 묻혀버린 느낌도 있고. 위에서 먼저 올린 동명의 노래와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 역시 감상하는 묘미 중 하나이다. 

 

  

 그래서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거냐고? 뭐 별거 없다. 그냥 음악 좋으니깐 듣고 즐기란 얘기였다. 그리고 그 '잉여'라는 단어가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바뀌었는가 하는 생각을 해봤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같은 이름의 두개의 트랙을 통해서 보여질 수 있다는 점이 신기하지 않냐는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그런 생각을 열심히 글이랍시고 써대고 있는 나 역시 '잉여'이지 않냐는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