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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연애 이야기/비가 그치듯 모든 게 괜찮아질 거야

음담패설에 대해

음담패설에 대해


음담패설을 하지 않은 지 너무도 오래되었다. 섹스에 대한 얘기가 더 이상 야한 얘기가 아니게 된 지금은 아마 음담패설이라는 것 자체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유희에 대한 염원을 담아 음담패설의 정의와 기능과 문맥을 탐구해 보기로 한다.

음담패설[淫談悖說]은 '음탕하고 덕의에 벗어나는 상스러운 이야기'를 뜻한단다. 요컨대 그것은, 상상 속 어떤 청자가 그것이 '덕의'에 어긋난다고 판단할 법한 이야기여야 하며, 음담패설의 즐거움 중 상당한 부분이 그 도덕적 금기성에서 우러나온다. 그 이야기는 또한 음탕해야 한다. 즉, 화자와 청자의 생각에 모두 음란하고 방탕한 이야기 -- 일종의 일탈의 의미마저도 담겼다고 볼 수 있는 -- 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이다.

다만 저 정의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음담패설은 -- 적어도 화자에게는, 그리고 그 대화에 기꺼이 동참하는 여러 청자들에게는 -- 즐겁지 않으면 안 된다. '유희'라고 하는 그 측면이, 저 정의에는 결여되어 있다. 음담패설은 -- 적어도 내가 만 나이로 스물한 살 정도까지는 지겹도록 해 왔던 것 같은 형태의 그 음담패설은 -- 그 자체로도 일종의 주이상스였다. 지적 자위! 말도 안 되는 언어유희와 더러운 연상작용 속에서 느껴지는 희열!


다음과 같은 문맥에서 섹스를 논하는 것과는 구분된다.

1) 문학 비평의 문맥 - 프로이트를 생각하고 네크로필리아를 생각해도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음담패설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2) 실제적인 성생활에 대한 상담이나 조언의 문맥 - 그런 문맥에서의 섹스는 음란하고 방탕하지 않다.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전에 친구의 남자친구가, 자기 여자친구가 나를 포함한 다른 친구 여럿과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나서 나중에 넌지시 물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저 아가씨들이 아마 세상에서 내 성기 구조에 대해서 제일 소상히 아는 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지.) 이 문맥에서 펠라치오를 잘 할 수 있는 법을 고민하는 것은, 고등어를 잘 굽는 방법을 함께 토론해 보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일상성 속에서는 그 무엇도 음탕함을 유지하기 어렵다.


아이러니하게도 순수의 상실[loss of innocence]이라는 것은 음담패설이라는 행위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그 시점 -- 시종 낄낄거리지 않고도 태연하게 섹스를 논하는, 섹스를 논하는 행위에서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 -- 이 아닌가 한다. 

섹스가 이미 야함의 범주를 벗어난 포스트-야함의 세계에서, 음담패설은 어떤 형태를 지녀야 하는가. 붐붐붐.

(맨정신으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