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구 <배설>/JHALOFF

화룡점정 - 도래하지 못할 책 (에쎄이)

화룡점정

1 장 추락

 

[     그것이 서울 상공에 나타난 것은 오전 11시었다고 목격자들은 말했다. 서울, 313, 일요일의 광화문 거리는 비교적 한산한 편이었다. 그것을 최초로 목격한 것은 교보문고에서 새로 나온 시집 몇 권을 사고, 귀가하려던 평범한 회사원 김 씨였다. 그는 구름 사이로 얼핏 뱀 같은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 외의 것은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김 씨는 자신이 헛것을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적어도 그가 무엇인가를 최초로 본 것은 사실이었다. 처음에 그것은 유유히 서울 상공을 날아다녔다. 구름 사이를 항해하는 그것은 하나의 배였으며, 등대를 찾아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작은 돛단배의 외로운 선장이었다. 뜨거운 햇살 아래, 반짝이는 비늘은 어느 순간 빛을 잃었다. 그와 함께, 힘을 잃은 듯, 그것은 서울을 향하여 서서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마치 성서에 묘사된 종말처럼, 영화 속에나 나올법한 장면처럼, 평범한 일상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거대한 포효와 함께, 점차 빠른 속도로 그것은 토끼 굴로 추락하는 앨리스처럼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지상에서 변함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던 사람들은 거리 한복판에서 멍하니 하늘을 응시하는 누군가의 치켜든 손가락에 하나둘씩 하늘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점차 많은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평상시에는 쳐다보지도 않던 시커먼 서울의 하늘을 주위 사람들처럼 주의 깊게 관찰했다. 눈치 빠른 이들은 무엇인가를 발견하여, 자기들끼리 좋아했고,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 이는 마치 자신도 무엇인가를 발견했다는 듯 옆에 사람들과 같이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둘씩 핸드폰이나 카메라를 꺼내서, 하늘을 찍기 시작하였다. 어떤 이의 사진 속 하늘엔 검은 물체가 잡혀있었다. 그리고 그 물체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커져갔다.

    마침내 사람들의 육안으로 확인할 정도로 그것이 가깝게 추락하자, 사람들은 하나둘씩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자신들의 머리 위를 향해 추락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먹이를 향한 개미떼처럼 모여들었던 그들은 돋보기로 지져지는 개미떼처럼 하나둘씩 넘어지고, 엉겨 붙으며,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그 와중에도 그것은 중력에 의하여 추락하고 있었으며, 마침내 고통에 가득 찬 울음소리를 울부짖었다. 사람들은 더욱 겁에 질려, 이제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밑에 깔린 사람들을 짓밟고, 살고자 몸부림쳤다. 그러나 그럴수록 혼란은 더욱 심해졌다.

    “용이다-!” 어느 누군가가 소리쳤다. 확실히 그것은 상상 속 이라고 밖에 표현할 도리가 없었다. 사람들의 상상이나 설화 속 묘사처럼 뱀처럼 긴 몸둥아리와 말의 머리, 흰 수염, 물고기와 같은 비늘, 네 개의 발은 각각 날카로운 발톱과 함께, 커다란 구슬 같은 것을 쥐고 있었고, 날개는 없었다. ]

 

    <화룡점정>은 고등학교 2학년 야자 시간에 딴 짓을 하면서 구상된 소설이자 현재까지 진행 중인 작품이다. 당시 나는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처음 읽었고, 불가코프가 볼란드의 첫 등장을 다루는 방식에 꽤나 반해있었다. 모스크바에 등장한 악마와 그를 둘러싼 거장과 마르가리타의 이야기가 어떻게 서울 상공에 갑자기 나타난 용과 관련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불가코프가 이 작품의 구상에 상당한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사실 이 글은 진행 중인 작품도 아니다. 신기하게도 나는 여기에 공개한 글줄 외에도 부분 부분적인 대화나 묘사를 싸질렀지만, 결코 <화룡점정>이라는 한 소설을 완성한 적은 없었다. 단순히 내가 무계획적이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공교롭게도 나는 글을 쓸 때, 상당히 구체적인 계획을 한 다음 쓰는 작가이고, 지금도 JHALOFF 폴더 안에는 화룡점정의 각 장의 내용과 등장인물들의 최후 등이 상세하게 적혀있다. 또한 드문드문 그들이 나누는 대화나 행적에 관한 설명들도 있다. 분명 그것들을 토대로 열심히 쓰기만 한다면, 적어도 그럴싸한 분량의 장편이 나올 수는 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아직도 이 작품은 진행 중(-ing)이다.

    글을 쓰며 살아가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중학교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사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다. 어쩌면 나는 굉장히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의 폴더 안에는 완성된 장편 소설만 벌써 4개지만, 대부분은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다. 아주 가까운 지인에게 고문에 가까운 형식으로 강제로 읽게 만들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즐긴 적은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한 번도 공모전에 도전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신춘문예나 기타 꽤나 저명한 장편 문학상에 고등학교 생활 동안 어림잡아 5,6 번은 투고해본 것 같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것은 일종의 복권을 사는 것과 같은 행위였다. 나는 결코 내가 쓴 글이 당선이 되어 출판이 될 것이란 생각을 한 적은 없다. 투고는 단순히 상금에 눈이 먼 행위였다. 혹시 아는가? 내가 쓴 쓰레기 같은 글을 5천만 원을 받고 팔면, 굉장한 성공이 아니겠는가? 5천만 원으로 사고 싶은 책이나 잡다한 것들을 사면, 나의 쓰레기 같은 원고가 그나마 유용하게 쓰일 수 있지 않을까?

    또다시 생각해보면 그것은 일종의 나 자신을 향한 제약이었다. 나는 계획적이며 무계획적인 인간이다. 만약 내가 어떤 공모전에 장편 소설을 응모하겠다, 란 제약을 걸지 않으면 나는 결코 나 자신을 위한 글조차 완성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작가의 꿈을 안 꿔본 것은 아니다. 내가 마음대로 쓰고, 독자는 그것을 돈을 주고 지불하면 성공한 인생이겠지. 하지만 어찌되었든 나는 나다. 나는 독자를 위한 글을 결코 쓸 수 없고, 독자들 또한 내가 쓴 잡글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이제까지 써온 습작들은 그저 위대한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에 불과하다. 위에 언급한 <화룡점정>은 그저 불가코프를 따라한 얄팍한 상상이며, 어느 일가의 몰살에 관한 소설은 그저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대한 빈약한 동인지이고, 서로 사랑하는 연인 두 사람을 모두 사랑하게 되어버린 어느 화가의 이야기는 어쩌면 조이스에 대한 동경이다. 나는 과거에 얽매인 인간이자, 문학에 얽매여 창조적인 사고가 결여된 유미주의자이자 예술지상주의자다.

    그렇다고 내가 문학이 세계를 구하리라, 와 같은 거창한 거짓말을 믿는 것은 아니다. 내가 믿는 것은 문학이 나 자신을 구할 것이란 믿음이다. 그리고 나는 곧 세계의 전부다. 나의 세계에서 오직 문학만이 나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러한 거창한 믿음에 당황할 것이다. 근본적으로 나는 문학이란 곧 거울과 같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거울. 문제는 모든 거울은 삐뚤어졌다는 점이다. 작가는 거울을 만든다. 그 거울은 작가 자신의 거울을 똑바로 비춰줄 수는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거울을 다른 독자들이 보면, 스스로 삐뚤어진 얼굴을 볼 것이다. 이는 문학의 장점이자 최대의 단점이다. 제각기 다양한 얼굴을 비쳐주는 거울은 읽기의 즐거움을 주지만, 결코 나 자신을 볼 수 없다.

    어쩌면 문학의 최종적인 목표, 정확하게는 독자의 최종적인 목표는 작가의 거울을 보는 대신, 자기 자신의 얼굴을 비출 수 있는 거울을 스스로 생산하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어떤 영화평론가가 그러지 않았는가? 영화를 사랑하는 세 단계는 영화를 보는 것이고, 영화를 평론하는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문학 또한 마찬가지다. 궁극적인 목표는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너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 너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대답한다. 나의 인생의 최종적인 목표는 나 자신에 대한 완전한 관조라고. 먹고 사는 것은 상관없다. 어떻게든 먹고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 뿐이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원하며 그것만이 내가 사색을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목적이었고, 내가 철학을 배우게 된 이유이며, 문학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뿌리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페소아를 처음 알았을 때 그에게 반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도 내가 쓰는 잡다한 글들은 모두 나를 해부하기 위한 시도가 될 것을 미리 알린다.)

    사실 이 잡다한 사색에 대한 목적은 없다. 어쩌면 나의 생각에 대한 정리를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나의 궁극적인 삶의 목적은 곧 나의 문학에 대한 목적과 일맥상통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나를 완전히 비추는 거울이다. 나는 나를 타자화하고, 나를 수많은 자아로 쪼개서 진정한 나 자신을 보고 싶다. 그러나 사실 이런 목적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며, 그것을 위한 무한한 시도와 실패만이 있으리란 것도 나는 잘 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관조라는 목표에 맞추어, 나 자신이 평생에 걸쳐 쓰고 싶은 두 작품을 예전부터 상상해왔다. 하나는 엘리엇의 표현처럼 허망한 도시들, 런던과 서울을 떠도는 어느 인간의 이야기이자, 세계를 통하여 자신을 보는 이야기다. 또 하나는 가면에 관한 이야기이며, 나 자신을 통해 세계를 보는 이야기다. 이러한 것들은 사실 무모한 시도이자 그저 결코 닿지 못할 절대 정신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평생 위대한 죄인의 생애에 대하여 쓰려고 했지만, 그가 남긴 것은 그 시도들뿐이었다. 플로베르는 평생 소용돌이에 관한 무언가를 쓰려고 했지만, 그가 처음으로 시도한 <부바르와 페퀴셰>는 미완으로 끝나버렸다. 나는 그 두 작가 뿐 만 아니라, 존재해왔던 모든 위대한 정신들보다 위대하지 않다.

    하지만 어떠하랴, 이러한 진행 중인 작품들, 결코 쓰여 지지 못하고, 도래하지 못할 책들을 꿈꾸는 행위는. 나는 꿈꾸는 독서가이자 사색하는 작가다. 어느 정도 우리 독자와 작가들은 돈키호테가 되어야할 필요성이 있다. 불가능한 책을 쓰기를 꿈꾸고, 읽지 못할 책을 읽는 환상에 빠지자.

    <화룡점정>은 어쩌면 내가 붙여준 제목 그대로 영원히 화룡점정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결코 그림에 눈을 그려주는 어리석은 행위를 하지 않을 거다. 대신 세계를 통해 나 자신을 쳐다보는 작품을 드디어 꽤나 오랜 사색 끝에 쓰기 시작했다. 이는 나 자신의 청춘을 위한 책이 될 것이며, 30대가 되기 전에는 완성될 것이란 막연한 계획만을 가지고 있다. 나는 기껏해야 며칠에 한 장 꼴로 아주 천천히, 그것도 영어로 쓰고 있지만, 언젠가 이 책은 완성될 것이다. 물론 누구에게도 공개는 아마 안 하겠지만. (여담으로 가면에 관한 이야기는 40대 이후부터 시작할 예정이다.) 독자가 읽지 못하며 독자에게 보여주지 않을 책을 꿈꾸는 나는 어쩌면 샐린저의 절필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꽤나 긴 주절거림이 되었지만, 뭐 어떠하랴? 나는 독자를 생각하지 않는다. 나 자신을 위로한 글을 쓸 뿐이다. 누군가는 자위행위라고 비난할지 모르지만, 사실을 말하는 것인데 뭐 딱히 상관은 없다.

 

-여담으로 오랜만에 상금이나 바라고, 공모전 두 곳에 원고 보낼 예정이다. 물론 떨어지겠지만, 최종적으로 떨어지면 조금 다듬어서 웹진에 연재해 볼 예정이다. 아마도. 확정은 없다.

-시를 쓰고 싶다.

-어쩌면 앞으로는 그냥 단순히 평론이나 예술론을 쓰는 것이 나의 성격에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어느 백치가 주절거리는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찬 이야기, 아무 의미도 없는…… 


추천: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책>

-모리스 블랑쇼, <도래할 책>

-프란츠 카프카, <소송>

-윌리엄 셰익스피어, <맥베스>

'구 <배설> > JHALOFF'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상함의 인식론 - 산문  (1) 2013.11.02
작가단장 1.도스토예프스키 (1)  (3) 2013.10.27
시 - 소녀와 꿈에 관한 꿈  (3) 2013.09.28
연옥 - 단막극  (1) 2013.09.19
역시 뒤늦은 자기소개  (0) 2013.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