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뒷편에는 어둠이 있겠지만, 어둠의 뒷편에 빛이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빛에는 모든 색깔이 다 숨어있지만 어둠에는 아무 색깔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둠의 뒷편에 무엇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일단 아무 것도 없다고 답해야 한다. 어둠에게는 어둠 나름대로의 원리원칙이 있어서, 사람이 어둠의 뒷편을 탐험하는 것은 유감스럽지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신 한 사람의 생애에 고작해야 한두 번 찾아올 아주 특별한 순간이라면 빛과 어둠의 틈새를 조금 엿보는 게 가능할 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가능하다. 시간이 앞에서 뒤로 흐르고, 중력이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때가 오면 어둠의 속살이 희미하게 보인다. 신앙 서사시처럼 거룩한 기회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는 인간의 몫이다. 그 때도 당당한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면 말이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영아가 꾸는 꿈은 말랑말랑한 공과 같다. 어머니의 부속물인 동시에 하나의 생명체로서 영아가 보는 세상은 끝없이 빠져들지만 끝끝내 안전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볼풀장과 같다. 영아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 세상의 빛이 닿는 모든 곳을 상상할 수 있기에 가장 완벽한 인간의 형태다. 아직 모든 이물질로부터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가장 순수한 에너지의 형상이다. 다른 포유동물이라고 해서 안 그렇겠냐마는 인간은 한 치 정도는 더욱 순결하다. 낯선 것들과 힘껏 맞서 싸워나갈 수 있게 다 준비된 전사로 태어나는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산도를 빠져나왔을 때 극도로 허약한 상태다. 이 약함이 인간을 순수하게 만든다.
나이를 먹을 것이다. 기적처럼 몸을 뒤집어 낼 것이고, 어느 순간 온 몸으로 중력을 느끼며 외줄타기 같은 삶을 걸어나갈 것이다. 넘어지면서도 다시 일어나 달려가고,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면 철봉에 매달려 무중력을 꿈꿀 것이다. 이미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은 칠흑 같은 어둠과, 어둠 속에 용해된 따뜻한 그 무엇, 자신도 타자도 아닌 그 무엇을 그리워 할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리워서 울겠지만 눈물의 의미를 깨닫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털이 없던 곳에 털이 나면서 시신경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정도로 많은 양의 액체를 흘리면서 더 높이, 더 멀리 갈 수 있는 신체를 가지게 될 것이다. 이미 몸이 말라버렸다는 것을 느낀다면, 물보다는 진한 액체를 마시며 끝없는 갈증을 채우려 할 것이다. 갈증 너머에서 환각을 보다가 문득 산으로, 바다로 뛰어가기도 할 것이고 모르는 것들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어느 순간 바람이 다 빠져버린 풍선이 된 것처럼 느낄 때, 있는 자리에 주저앉아 부지런한 농사꾼과 농사꾼의 아내가 될 것이다. 이제 세상은 계속 달려가지만 차마 삶의 터전을 떠나지 못해 아무 것도 없으면서 그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지키려고 낮에는 쟁기질을 하고 밤에는 횃불을 든 채 문을 지킬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을 쏙 빼닮은 아이를 만나 서른 해 전 자신의 모습을 그때서야 객관적으로 관찰할 기회를 얻을 것이다. 아이의 다리는 너무도 튼튼하고 입은 너무도 빨라서 따라가기 힘들다는 걸 느끼는 순간이 오면 아이는 이미 멀리 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아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터벅터벅 걸어가다가 결국은 아무 데나 열린 문으로 들어가 털썩 엉덩이를 내려놓을 것이다. 모래알을 세듯이 지루하나 해변을 쓸어내리는 파도처럼 재빠른 시간의 등에 어느새 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 이제는 지나간 것들의 의미를 하나 둘 깨닫게 될 것이다.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알 때 자신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을 것이다.
바로 지금 깜빡이는 눈 앞에서 어둠이 보인다. 눈을 뜨고 있을 때 어둠이 있고, 눈을 감고 있을 때 빛이 있다가 그 반대로 된다. 그렇게 빛과 어둠을 구별하기 어렵게 된다면 마침내 빛의 뒤에도 빛이 있을 수 있고, 어둠의 뒤에도 어둠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또한 그것을 인정한다면 어둠의 뒤에 어둠뿐만 아니라 전혀 알지 못했던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쉬운 깨달음을 위해서 너무 오래 기다려와야했지만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겸허히 어둠의 문이 열리길 기다릴 것이고, 길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끝까지 고개를 돌린 채 어둠을 외면할 것이다. 하지만 어둠의 입이 인간을 집어삼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살아 있는 동안 수많은 사실과 거짓들 속에서 헤매야 했지만 이제 누구나 공평하게 세계의 진실을 공유하게 된다. 어둠의 뒷편이 꽤나 따뜻한 곳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화롯불을 쬐며 방금까지의 추위와, 추위의 기억을 녹여버리는 기분으로 녹아 스며들 것이다. 그러니까 어둠의 뒷편은 우리의 미래다.
(2013.12.23)
연말연시를 맞아서 연말연시 스러운 글을 써보았습니다.
모두 행복하고 충만한 시간 보내시길 빕니다.
'구 <배설> > 심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릴레이 소설1을 처음으로 이어씀 (0) | 2014.01.13 |
---|---|
승리의 방식 (0) | 2014.01.07 |
불치병 (0) | 2013.12.20 |
제목 미정(2) (0) | 2013.12.12 |
그렇게 사랑했다는 걸 깨달았을 때엔 (0) | 2013.1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