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구 <배설>/심연

산맥 (1)

어둠 속에서 몸집을 드러낸 아파트의 윤곽은 중세 유럽의 성벽 같았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지방의 중심도시라고는 하지만 서울처럼 빼곡하게 들어찬 고층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도로 양옆으로 도열한 나트륨등도 끝난 지 오래, 버스는 밤을 밟으며 달렸다. 그는 많지 않은 승객들을 둘러보았다. 일요일 밤에 서울을 등지고 달리고 있다면, 십중팔구 서울이 아닌 곳에 있을 생활의 터전으로 돌아가고 있을 것이었다. 한참 스마트폰으로 예능 프로그램인지 드라마인지를 들여다보던 뒤에서 두 번째 자리 여자는 입을 살짝 벌리고 잠들어 있었다. 불 꺼진 건물들이 옆으로 휙휙 스쳐지나갔다.

그는 사실 곧 도착할 도시에 아무런 연고도 없었다. 기억에도 없는 아주 어린 시절에 살았다고는 하지만 그 시절의 사진조차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남남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 점이 그가 도착지를 고르는 데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길에서 행여나 누군가 아는 사람을 마주칠 확률이 없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았고, 바다가 가까이 있으면 더욱 괜찮았으므로 이 도시가 눈에 들어오는 건 당연했다. 남쪽 해안에 접한 도시들은 왠지 짭조름한 바다냄새가 연상되어 선택에서 제외되고 나니, 남는 건 깊고 푸른 눈동자를 연상시키는 K시뿐이었다.

한산한 터미널에 내리자 비행기를 타고 남의 나라에 내린 것처럼 낯설었다. 왠지 금방이라도 어두운 피부의 남자들이 딸라를 외치며 행선지를 물어볼 것 같았다. 하지만 택시는 터미널 앞에 숨죽이고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줄 뒤쪽에 선 택시 운전수들은 숫제 밖으로 나와 담배를 태우는 중이었다. 그가 오기 직전에 전화로 예약한 숙소의 이름과 지명을 대자 택시 기사는 잘 안다는 듯이 대답했다. 택시 안의 공기가 답답해서 창문을 슬며시 내리자 바람이 이마를 툭툭 건드리고는 다시 빠져나갔다. 관자놀이가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이곳에 오기 전, 국장의 방에서 나던 텁텁한 한약재 냄새가 생각났다. 국장은 직접 그를 불러서 하얀 봉투를 밀어주었다.

어디든지 가서 바람 좀 쐬고 오게. 다 살자고 하는 일 아닌가.”

국장쯤의 위치에 자리에 오른 사람이 할 만한 전형적인 대사라고 생각하며, 그는 조용히 봉투 위에 손가락을 올려두고 두께를 가늠해보았다.

국장님. 정말 괜찮습니다, 저는. 죄송합니다.”

지금 박 기자가 잘못했다는 게 아니에요. 조금 잠잠해지면 다시 봅시다.”

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봉투를 집어 들었다. 국장 정도 나이면 이미 머리가 훤히 벗겨진 사람도 있었지만 듬성듬성 보이는 흰머리를 제외하고는 머리숱이 빼곡했다. 국장의 눈가에 있는 주름이 축 쳐진 것이 바다사자의 접힌 살들을 보는 것 같아서 피식 웃음이 나올 뻔, 그러다가 문득 국장이 불쌍해졌다. 안간힘을 써가며 올라왔을 텐데, 저 치에게도 처자식이 있고 돌아갔을 지도 모르는 부모님이 있을 텐데. 누가 누구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인가 싶으면서도 국장에게서 연민을 느껴버리는 바람에 한 마디 못 하고 그대로 국장실을 나왔다. 잡무를 담당하는 직원이 그를 흘낏 보고 복사기에서 나온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는 자리로 돌아와 가방에 펜이니 수첩이니를 쓸어 넣고 밖으로 나갔다.

애초에 기자가 되려던 생각을 하고 살아온 건 아니었다. 대학에서 괜한 사명감에 남들이 피하는 전공을 택해놓고 어쩌다보니 졸업할 때쯤 기자가 괜찮아 보여서 이 길로 온 것뿐이었다. 오히려 그는 같이 스터디를 하던 사람들의 열망에 깜짝 놀랐다. 그와 같은 과이지만 정작 수업에서 본 기억은 나지 않던 여자애는 입학할 때부터 저널리즘에 관심이 있었다며 교내 신문사에서 일할 때의 경험을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해외여행을 다녀와서 여행기를 책으로 낸 적도 있다던 인문학도는 이상하리만큼 매체 관련된 정보에 빠삭해서 다른 스터디원들의 부러움과 질시를 동시에 받았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기자가 하는 일은 그냥 있었던 일을 쓰는 것, 그뿐이라고 믿어왔고 그 생각에 굳이 변화를 줄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그런 마음자세로도 글은 술술 써졌고 스터디원들은 다소 무심한 그의 표정과는 반대로 생동감이 넘치는 글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할 때가 많았다. 신문사에서 면접을 볼 때도 그는 어느 알피니스트가 했던 산이 그곳에 있기 때문에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사람들이, 사건들이 그곳에 있기 때문에 쓴다고 답했고 대체 무슨 생각에서인지 신문사는 그를 채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그는 매일같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구 <배설> > 심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타자성을 느끼기 위하여  (3) 2013.11.08
산맥(2)  (0) 2013.11.05
털이 이상해졌다  (2) 2013.10.28
카루타로 향하는 좁은 길(2)  (0) 2013.10.05
이별의 사유화인가 사회화인가  (0) 2013.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