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구 <배설>/심연

여우비

여우비

 

서울보다 딱 한 뼘만큼 해가 높은 도시에 살았다 배를 충분한 물로 마땅히 채워야 했다 내다버려도 아침마다 거미줄 치는 거미새끼처럼 끈질기게 살았다 의뭉스러운 나의 취미는 풍선을 입에 문 채 킥보드를 타는 아이를 보거나 쭈그리고 앉아 사포질하는 노동자를 보는 것이었다 집에 들어오면 그림자가 나를 맞아주었다 모든 것은 습관의 문제였다 장을 보고 나왔을 때 촉촉해진 아스팔트를 보면 소시지 치즈 닭고기 동전 영수증 눈물 초콜렛이 톡 떨어져 와르르 쏟아졌다 꼭 그래야만 했다 톡이 먼저고 와르르가 그 다음이었다 전부 제 갈 길을 가는데도 흘러내린 화장이나 챙기는 내가 우스워서 연극처럼 웃었다 거미가 웃으니 아이가 웃고 노동자도 따라 웃었다 텅 빈 자리에 간신히 매달아 놓았던 추가 톡 떨어져 무너졌다




*노트


원래 나는 산문시를 안 썼고 또 못 썼다. 시를 쓰는 사람들이 어쩌다가 시를 쓰기 시작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나는 좋은 시들을 읽었기 때문에 시를 쓰게 되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국어 선생님이셨다. 중학생이 되어서 처음으로, 공부의 부담을 느끼며 필기를 해가며 배웠던 김지하의 시가 아직도 생각난다. 제목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새봄>. 4행짜리의 몹시 짧은 시였지만 동시와 시 사이에는 글자 한 개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었더라면 나는 시를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담임선생님은 우리가 좋은 시들을 읽고 외우길 바라셨다. 때때로 시를 외우게 시켜서 못 외우면 그 선생님의 특기였던 귀 꼬집어 비틀기를 하셨기 때문에 나는 시를 외울 수 있었다. 그때 외웠던 시는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 <목마와 숙녀>(이건 꽤 길었다!),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워즈워드의 <초원의 빛>, <무지개>, 주희의 권학하는 <우음>(소년이로학난성~) 등등. 그때는 그 시들의 의미를 잘 몰랐지만 말하자면 선생님께서는 내 안에 씨앗을 심어주셨다. 그래서 나는 중학교 2학년이 되어서인가 어느 순간 시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단히 유치했지만 언어는 금방금방 잘 자랐다. 시적 감각이 아주 뛰어나다고는 할 순 없었지만 열심히 머리 굴려서 썼으니 읽어줄 만은 했다. 지금 보면 어린 나이인데도 대단히 묘한 문제를 다루는 시가 간혹 보여서 스스로 놀라기도 한다. 그렇게 시를 쓰다가 고등학교에 올라올 즈음에는 연 구분을 하지 않은 시를 쓰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발음 상의 조탁을 매우 중요하게 여겨서 읽으면 거의 랩처럼 직설적인 운율이 느껴지는 시를 썼다. 이런 내가 쓰지 않는 것은 바로 산문시였다.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백일장 수상작을 보면 산문시들이 꽤 보이곤 했다. 그렇지만 산문시는 정도가 아니라고 믿었던 나는 산문시를 쓰는 청소년들을 마음 속으로 유치하게 경멸했다. 시라면 마땅히 아름다운 운율을 드러내는 데 힘써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던 내가 산문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은 바로 518백일장 수상작을 읽고 나서이다. 매년 이 즈음이 되면 인터넷에 회자가 되는 작품인데, 아는 분들은 이미 떠올리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바로 <그날>이라는 작품이다. 그 시를 보고 나는 산문시가 있어야만 하는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다. 물론 그 뒤로도 나는 산문시는 쓰지 않았다. 써오질 않아서 쓰질 못한 게 아마 가장 큰 원인이 아닐까 싶다. 그러다가 얼마 전 처음으로 산문시를 쓰면서 어린 날의 나를 질책하게 되었다. 산문시를 쓰는 청소년들은 조탁에 게으른 게 아니라 더욱 철두철미했을 것이었다. 산문시가 기존의 운문에 비해 형태적으로 쉬울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산문시가 단순히 산문이 아니라 시로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는 아주 큰 노력이 필요했다. 이 시는 내 두번째 산문시다. 아직도 시를 모르고, 산문시는 더욱 모른다. 그래도 내가 시 쓰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만큼은 잘 알고 있다. 뒤도 안 돌아볼 정도로 좋아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14.05.14.

'구 <배설> > 심연' 카테고리의 다른 글

ground zero  (0) 2014.03.07
파업 공지  (1) 2014.01.15
유인 미사일(The Manned Missiles)  (0) 2014.01.13
릴레이 소설1을 처음으로 이어씀  (0) 2014.01.13
승리의 방식  (0) 2014.0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