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쓰기 전, 제목에 대하여
1월 주제 'if all else fail'에 맞추어 쓰는 죽음에 대한 짧은 글이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문장을 제목으로 삼았다. 가벼워 보일수록 좋다.
어디선가, 죽은 후의 사람은 근육에 힘을 줄 수 없기 때문에 사체의 온갖 구멍으로 배설물이 흘러나온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나는 아직까지 시신을 직접 본 적이 없으므로 이 도시괴담 같은 이야기의 진위 여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시신을 수습할 때 귓구멍이며 콧구멍 같은 데에 솜을 틀어막는 것을 생각해보면, 물론 오래 전 영혼이 빠져나갈까 하는 생각에서 비롯된 관습적인 행위일 수도 있겠지마는, 이 배설물 이야기도 아주 타당성이 없는 것만은 아니리라 생각된다. 게다가, 배설물이 어떻게든 체외로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대체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동물의 배 속에 또 다른 동물을 채우는 과정을 반복해 만든 요리처럼, 나오지 못한 배설물로 채워진 시체는 어딘지 기묘하고 불쾌하게 느껴진다. 그러한 가능성을 생각하느니 차라리 배설물이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믿어버리겠다고 결심할 만큼 말이다.
모든 것이 실패하더라도 내게는 죽을 힘이 남았다, 는 말은 남용이다 싶을 만큼 자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그러나 삶이 살아가는 것과 살아지는 것으로 다시 나누어지듯, 죽음도 오롯이 우리의 권능에 속하는 것만은 아니다. 죽음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에서조차 우리는 실패할 수 있다. 이때에 우리는 죽는 대신 죽어지고 만다. 그러니까 죽음마저도 필연에 속하는 지경인 것이다. 이 지경까지 오고 나면, 우리는 ‘모든 것에 실패했다’는 말보다도 더 실패한 셈이다. 이것은 실패 중의 실패다. 더 물러설 곳도 없는 실패이다.
<배설>의 종간 공지에 뒤이어 글을 올린다. 자살 직전의 유언처럼 종간 공지는 쓰였으나 사실 <배설>은 자살하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늙고 빠르게 약해져 빠르게 자연사했을 뿐이다. <배설>은 죽어졌다. 그러니 <배설>이 살고 싶었는지 죽고 싶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배설>은 물러설 곳 없이 실패했고, 죽은 <배설>의 구멍으로는 이 짧은 글과 같은 잔여 배설물이 흘러나올 것이다.
죽은 것은 <배설>뿐만이 아니다. 여기저기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누군가는 한국 문학이 죽었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문학이 죽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은 문학뿐 아니라 아예 인문학이 죽은 것이라고도 한다. 그것들은 스스로 죽을 힘도 없어서 인간들의 입으로 죽음을 선고받았다. 뻣뻣한 사체에는 애정 어린 안타까운 시선이나 그러게 내 뭐랬어, 하는 비웃음 같은 것들이 무수히 쏟아진다. 그리고 몇몇은, 그 사체가 언젠가 다시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지기도 한다.
하지만 문득 생각한다. 죽을 힘도 없이 죽은 것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완전한 실패를 보면서도 그 속에 성공이 숨어있을지 모른다는 낙관주의자들의 희망은 과연 얼마나 응답받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시체를 부검하듯 국문학을 공부하려는 나는 문득 죽은 것들의 구멍을 떠올린다. 생전에 미처 체외로 꺼내지 못한 배설물들이 꾸역꾸역 쏟아져 나오는 그 구멍들을 생각한다.
모든 것이 실패할 지라도, 단 하나의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깊이를 모르는 그 구멍들에서 흘러나오는 사체의 마지막 배설물을 토대로 움틀 것이다, 라고 나 역시 근거 없는 믿음을 키워본다. 그렇게 믿고 나면, 우리는 배설물이 모두 흘러나올 때까지 대책 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다.
기다림은 아주 길고 배설의 끝은 아주 느리게 다가올 것이다.
어쩌겠는가. 물러설 곳 없이 실패했으니, 그저 기다릴 수밖에.
세상의 죽은 것들의 구멍을 보며,
나는 오래, 기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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