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면 아침일 줄 알았는데. 침낭에 그대로 누운 채 눈만 깜빡거린 성현이 본 텐트의 벽은 아직 어두운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꿈을 꾼 것이 분명한데 분명한 건 꿈을 꿨다는 사실 뿐이다. 멀리서 새들이 만드는 소리도 들린다. 가지로부터 날아오르는 소리, 다시 내려앉는 소리, 방향 모를 지저귐. 소리야 어떻든 다시 잠들기 위해 눈을 감고 어깻죽지를 침낭바닥에 비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이 무색하게 점점 또렷해지는 의식. 이래서 해도 뜨기 전에 깨는 게 싫단 말이지. 앞으로 적어도 사흘 동안은 지금 못 자둔 잠 때문에 밑진 느낌을 가질 자신일 게 뻔했다. 그렇게 뒤척이기를 이십여 분 간 반복한 뒤 성현은 결국 다시 잠드는 것을 포기하고 머리맡에 놓아두었던 안경을 찾아 손을 더듬거렸다. 안경이 한 번에 손에 닿지 않는 일상적인 경험은 그를 또다시 매일처럼 얼굴을 찌푸리게 했다. 결국 베개 밑에서 찾아 낸 안경을 대충 코 위에 걸친 성현은 핸드폰 대기화면에 표시된 시간을 보곤 한 번 더 지분거렸다. 술이나 먹고 잘걸, 난 술 먹으면 잘 자는데. 핸드폰 화면에 표시된 채팅 어플리케이션을 누르고 화면이 바뀌기를 기다린 때, 귓가에서 새소리가 멀어진 때 성현은 문득 오늘이 무슨 날이었는지 깨달았다. 반쯤 잠에 잠겨있던 머릿속이 온전히 수면 위로 떠올랐다. 오늘은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다. 내가 있는 곳에서 이제는 재만 남았을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친 둥근 원터치 텐트 안에서 잠자고 있을 사람과 함께할 마지막 날. 핸드폰의 바뀐 화면은 밤새 쌓인 메시지들을 알렸지만 성현은 확인도 않은 채 화면을 꺼버렸다. 잠을 깨우는 것을 나만큼이나 싫어하는 사람이었고 그렇다고 아침을 준비하기엔 더더욱 이른 시각이었지만 성현은 마지막이란 단어 앞에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침낭 옆에 아무렇게나 벗어놓았던 옷들을 챙겨 입고선 텐트에 달린 문을 열었다. 바람이 매서웠다. 헤어지기 좋은 날씨라고, 성현은 생각했다.
그 날은 분리수거를 하는 날이었다. 성현이 사는 원룸 아파트 단지는 분리수거한 물품들을 수거해가는 트럭이 아침 이른 시간에 오기 때문에 대부분의 주민들은 전날 저녁에 분리수거할 거리들을 내놓는다. 사실은 자기 편할 때 내놓는 게 제일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작년에 일 년에 두어 번 있는 입주자 회의에서 단지의 미관을 위해 분리수거 물품은 차가 오는 수요일에 내놓기로 결정되었고 바로 그 다음 주에 아침 일찍 이미 쓰레기차가 다녀간 풍경을 멍하니 확인한 입주자들은 곧바로 회의 내용을 고쳐 엘리베이터마다 전날인 화요일 저녁에 분리수거 물품들을 내놓기로 하자는 내용의 인쇄물들을 붙였다. 물론 성현은 그 자리에 없었고 있었다면 무심히 듣다가 말없이 반대의사만 표시했겠지만 그는 이 소식을 한참 있다가 직장 동료로서는 유일하게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슬기로부터 들었다. 성현이 평소 슬기와 별로 많은 애기를 나누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러나 성현이 집안에 쌓인 분리수거 물품들을 두 달 만에 밖으로 가지고 나왔었을 때 마침 슬기는 성현보다 조금 늦게 퇴근하고 오는 길이었다. 그녀는 피곤한 기색도 없이 성현을 붙들고 몇 주 전 입주자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들을 알려주었다. 성현은 맨발에 슬리퍼를 신었을 뿐이라 발가락 사이로 스며드는 추위 때문에 붙임성 좋은 그녀의 성격이 귀찮았고, 동시에 자신 앞에서 웃는 낯으로 친절히 설명하는 슬기기를 두고 이런 감정을 가지는 자신이 못돼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이 아파트에 처음 들어올 때 부동산 아주머니가 혼자 사는 직장여성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했었다. 자신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런 결정은 그 사람들이 내렸으리라. 분명 그 날 슬기를 엘리베이터 안에 남겨두고 먼저 내린 성현은 문에 설치된 잠금장치의 뚜껑을 열고 버튼을 꾹꾹 누르며 한 생각이었다. 그 날은 성현이 전날 저녁에 일찍 잠들어버린 탓에 수요일 아침 댓바람부터 트럭이 오기 전 분리수거를 한 날이었다. 성현은 아파트 입구에서 매번 맞닥뜨리지만 귀찮은 건 매한가지인, 아니, 매번 해야 하기에 귀찮은 입주자 확인 절차를 터치스크린에 비밀번호 일곱 자리를 누르는 것으로 통과했다. 그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기 전 우편함에 꼬리부분만 빼꼼히 나온 채 꽂혀 있는 하얀 엽서 카드를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그건 청첩장이었다. 정아가 보낸.
전화를 걸었다. 영화처럼 아무렇지 않은 척 노력하며, 그러나 사실은 아무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며 ‘여보세요’라고 해야 할까. 아니, 나는 항상 내가 설계한 일에 대해선 정작 일어나는 일들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으니 혹시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닐까. 발신음이 멈췄다. 바로 어제 들었던 것 같은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렸다. 여보세요. 여기 보세요. 당신이 불렀기에 나는 내가 아는 당신을 보고 있다. 지금의 당신을 이렇게 볼 수는 없겠지라는 생각은, 소설처럼 살고 싶은 바람일 뿐일까?
“옛날에 쓰던 컬러링 좋았는데, 이제 안 쓰네.” 생각하고 한 말이 아니었다.
삼성역 부근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오전에 일이 손에 안 잡혔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한 번도 제대로 본 일이 없는 사무실 천장의 벌레무늬 텍스를 세기도 했다. 정확히 백하고도 열 마리를 더 센 후에 포기했지만. 정아가 결혼한다. 남자의 이름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어떤 점이 좋고 나쁜지, 내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애써 고민하고 싶지 않다. 중요한 건 그녀가 결혼한다는 것이고, 나는 그 사실을 곱씹을 때마다 기분이 나빠진다는 것이다. 만나서 뭘 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만나자고 했고 말을 던진 직후에 내가 아차 싶었던 것과 달리 그녀는 그러자고 했다.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 말고는 카페에 간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무슨 생각에선지 커피나 마시자고 했고 그녀는 또다시 그러자고만 했다. 전화는 그렇게 끊었었다. 언제나처럼 두 손으로 수화기를 붙잡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정아의 모습을 떠올리며. 부장이 점심 먹을까라고 말을 떼자마자 재킷을 집어 들었다. 과장이 노골적으로 무슨 짓이냐고 눈짓을 줬지만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과장 대신 옆에 앉은 현우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야 너 왜 그래. 어디 가냐?”
“부모님께서 서울에 올라오셔서. 점심시간 동안 잠깐 나가서 뵙고 오려고.” 언제나처럼 비슷한 핑계를 댔다. 핑계란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다. 핑계를 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럼으로써 나는 내가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음을 시인하는 게 되는 것이고 타인은 나에게 불만을 갖는 것이 정당화된다. 누군가를 마음 편하게 비난할 수 있다는 것은 인기 있는 권리다. 분명 등 뒤에 대고 현우인지 과장인지가 무어라 한 것 같다. 본의 아니게 폼 잡고 돌아선 꼴이 되어 머쓱했지만 부장의 책상 쪽으로 고개를 꾸벅거린 뒤 망설임 없이 사무실을 나갔다. 쌀쌀해진 날씨에 옷깃을 여몄다. 조금 더 두꺼운 겉옷을 입을까 고민했던 아침이 떠올랐다. 정아를 만나는 날이 아니었다면 별 망설임 없이 더 두꺼운 옷을 입었을 거란 생각을 했다.
성현의 눈에 비친 정아는 3년 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조금 더 해쓱해진 것 같았다. 그러나 잘은 모르지만 화장법도 이전과 비슷했고 무엇보다 여전히 안경을 쓴 체였다. 정아가 그곳에 있었다. 성현은 정아가 안경을 벗은 모습을 딱 두 번 봤다. 대학 신입생 시절 선배를 통해 소개받을 때가 처음이었고 성현은 입대를 준비하고 정아는 교환학생을 준비하던 때에 정아가 여권사진을 찍으러 갈 때 따라가 본 것이 두 번째다. 정아가 다른 대부분의 여자들과는 달리 계속 안경을 쓰는 이유는 그녀가 렌즈를 불편해 하고 눈 수술을 무서워해서도 있지만, 정아는 안경이 정말 잘 어울리는 여자였다. 성현이 정아를 좋아하게 된 것도 두 번째 만남부터였다.
“안경 안 바꿨네.”
마주앉은 정아에게 커피잔을 건네며 말했다.
“응”
짧게 대답한 정아는 곧 고개를 숙이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정아의 짧은 대답이 야속하지도 않다. 그녀는 나보다 더 불편할건데. 상대가 이해되는 순간 우리는 상대를 미워하는 게 불가능해진다.
“두 달 정도 남았더라, 결혼.”
가장 꺼내고 싶지 않았던 얘기들이 벌써부터 내 입에서 나온다. 그만 의식을 놓아버리고 싶다. 될 대로 되라지라는 심정으로 아무 얘기라도 하고 싶다.
“잘 지내?”
정아는 ‘응’이라는 당연하고 쉬운 대답 대신 이렇게 물었다.
“나야 뭐, 직장 다니지. 올해 여름휴가를 못 썼어서 조만간 못 쓴 휴가에 연차 합해서 어디 여행이나 다녀올까 하는 생각만 하고 살아.”
분명 이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그러나 계획단계에 들어서지도 못한 일이었고 무엇보다 지금 왜 이 이야기가 나오는 건지 성현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어디로 갈 건데?”
“그냥 국내에 아무데나. 여기저기.”
“그렇구나.”
사람 사이의 일은 성격이 급한 쪽이 항상 손해를 본다. 대화도 당연히 그런데, 대화가 끊기고 난 상태에서는 그 침묵을 더 견디기 어려운 사람이 결국 상황에 책임을 지고 아무렇게나 말을 던진다. 그것은 혼자 짊어질 책임이 아니지만 성현은 스스로를 어떤 종류의 인간으로 못박아버리는 게 자신에 대한 폭력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결국 초조함을 견디지 못했다. 어떤 생각으로 다음 말을 꺼냈는지는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우연히 던진 말 한 마디가 내가 정말로 하고 싶던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엔 우연적으로 결정되는 일이 많으니까. 그리고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일이 일어난 뒤에 우리가 이름 붙이는 거에 불과하니까.
“같이 가자.”
그 때 성현은 정아의 눈이 커지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움찔거리는 정아를 보고서 성현은 그녀가 잠시 당황했음을 알았다. 그러나 오히려 성현 자신은 다시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이게 내가 하고 싶던 말일지도 몰라, 아니 무슨 말이면 어떤가. 분명한 건 지금 내가 아까보다 정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