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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배설>/healingpen

무엇이 사랑이 될 수 없는가에 대하여–‘우리가 헤어진 진짜 이유’에 대한 덧붙임


*이 글은 노래 가사 우리가 헤어진 진짜 이유에 대한 분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다음은 가사 전문.


주로 이별 노래들은 떠나가지 말아라 하고 붙잡거나 상대방이 떠난 후의 아픔에 대해 당한 사람처럼 노래한다. 그리고 헤어진 이유에 대해서 제 나름대로 너와 내가 달라서, 성격이 맞지 않아서, 내가 부족해서라고 구구절절이 해석한다. 그런데 ‘우리가 헤어진 진짜 이유’는 이별에 대해서 ‘그래야만’했던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이별이 사랑이 될 수 없었던 모습들 가운데 어떤 것이 사랑을 사랑이게 하는 지를 엿볼 수 있다.

이 노래에서는 먼저 헤어짐의 과정에 가까워지던 단계들을 그린다.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하는 과정과 노력이 오히려 관계를 멀어지게하고 지루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결국 상대방이 그 시도와 노력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이러한 시도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유는 그 사람이 바라던 것이 ‘설레임뿐’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시작하는 데에 처음의 감정들은 중요하다. 아무리 사랑이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라고 정의하더라도 결국 성애에서 성적 매력과 각종 ‘조건’들이 결합된 서로를 자극하는 매력이 없다면 사람들은 사랑하기로 선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연애감정’들은 관계의 지속과 발전을 담보해주지 못한다. 설레임이라는 연애감정은 상대방을 잘 모르고 아직 신비화되어있는 단계에서 그 사람에 대한 관심을 두게 만들고, 처음으로 그 사람을 사랑하겠다고 결심하게는 만들지만, 그 행동을 지속시키는 동력으로는 부족하다. 사랑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지속되려면,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이미지화 된 모습에서 상대방의 실체로 나아가는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을 '생명'을 주고 받는 활동으로 정의한다. 생명은 살아있음을 말하고, 살아있다는 것은 죽어있지 않다는 것, 정체되어있지 않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생명을 준다는 것은 결국 상대방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가능성을 만들고 변화해 나갈 수 있는 에너지를 준다는 말이다. 또한 생명력이 있는 활동의 에너지는 움직이기 때문에 다시 나에게도 돌아온다. 이러한 활동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충만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이루어져야 그 사람이 어떤 가능성과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제대로 실천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활동은 단순히 혼자 결심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여길 때만 이러한 노력을 투자할 마음을 먹게 된다. 화자가 ‘영원한 사랑을 꿈꾸’었다고 말했던 건, 단순히 오랫동안 지속되는 사랑이 아니라 이러한 ‘운명공동체’적인 지향성과 가치관을 담은 사랑을 뜻할 것이다. 그런데 이 가사에 나오는 상대방이 화자를 ‘바라본’ 것이 처음뿐이라면, 그 사람은 그 이후에 더 이상 화자를 들여다보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져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대방이 이미 가능성을 닫아버린 ‘죽은’ 상태라면 화자가 아무리 사랑하려고 노력해도 사랑할 수 없다. 결국 화자의 담담한 ‘날 사랑한 적이 없다’는 말은 감정이 아닌 사랑의 행위의 부재에 대한 선언과도 같은 것이다.

이 연애는 두 사람에게 ‘다르게 쓰이고’ ‘다르게 남’았다. 상대방은 이 끝을 감정이 식어 멀어진 사랑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화자에게 이 연애는 사랑의 실패다. 그런데도 화자는 꿈속에서 다시 그 사람과 똑같이 사랑의 감정에 빠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실컷 2절 내내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하고도 이런 ‘고백’을 하는 건, 어떻게 보면 현실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상적인 모습에서 멀어진 사랑의 모습들을 쉽게 비판했지만, ‘바람직한’ 사랑을 실천하려고 하는 사람들조차 쉽게 뒤엉키고 자기 모순에 빠진다. ‘나쁜 꿈’이라고 말하는 것은 화자가 여전히 그 사람과의 사랑을 미화시키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지만, 여전히 남은 감정과 화자가 기억하는 좋은 모습들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혼자 남은 이 자리에 조금 더 있는 것이다. 이상적인 사랑을 아무리 그려보려고 애쓴다고 해도 그것이 실천의 문제로 내려오면, 우리는 완성된 상태로 가는 과정 속에 버티고 있는 욕망들과 생각들을 향해 끊임없이 부딪히는 것이다. <사랑의 기술>에서 실컷 사랑을 말하는 프롬도 애초에 서론부터 실천에 대해서는 할 말이 별로 없긴 하지만이라고 수그리고 들어간다. 결국 사랑을 하는 문제는 다시 우리 손 안으로 굴러떨어진다. , 어쩌면 그 어설프고 엉망인 사랑의 모습들이 우리를 다시 사랑으로 다가가게 만드는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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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낸 과제의 약간 revised된 버전. 얼떨결에 지나가버린 2번째 주제 이별과 맞닿아있다. 사실 수업에서 읽었던 <안티고네>에서 사랑과 죽음이 연결되는 지점에 대해 이야기 했는데, (교수님은 죽음과 자신을 일체화 한 안티고네를 사랑의 아이콘으로 읽으셨다) 잘 모르겠어서 이해하기 위해 그 주제를 써보고자 했으나 적당한 가사를 찾지 못해 실패. 이건 나중에 다시 시도해보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