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배설>/심연

세계의 끝, 벼룩시장

nanunsaram 2013. 12. 7. 23:30

세계의 끝이라고 하면 나는 예전에 본 애니메이션을 떠올린다. 세계의 끝에 있는 마녀를 찾아가서 무슨 책을 빼앗아오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배경도 중세스럽고 주인공도 도적놈인지 해적놈이었으므로 세계의 끝이 수직으로 떨어지는 바다로 묘사된 게 꽤나 자연스러웠다. 정확히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주인공은 그곳에서 일종의 차원의 문 같은 걸 통해서 마녀가 살고 있는 데로 뛰어내렸다. 하지만 거기서 만약에 계속 떨어진다면 어디로 갈까? 나는 무한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땅이 평평한 사각형이라고 상상했던 옛날 사람들만도 못한 상상력이다. 과학은 우리에게 알아야 할 것은 알려주지 않았고, 알지 않아도 좋은 것만 알려주었다. 어쨌거나 기회가 있다면 세계의 끝에서 뛰어내려보고 싶은 심정이다.

 

뮌헨은 대체로 아름다운 도시다. 오래된 풍경을 간직하면서도 대도시의 풍채를 갖고 있으니 흔하지 않은 조합이다. 여기에서는 애초에 스카이라인이라는 개념이 성립하지 않는다. 내가 사는 곳 근처의 공원 언덕에 올라가면 뮌헨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데, 뮌헨 중앙에 솟아 있는 성모교회(Frauenkirche)보다 높은 건물은 외곽에서야 드물게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실제로 뮌헨 도심지역에는 성모교회보다 높은 건물을 짓지 못하게 규제되어있다고 한다. 내가 사는 곳과 방금 말한 공원을 사이에 놓고 커다란 순환도로가 지나가는데, 바로 이 순환도로가 도심지역의 경계라고 한다. 말하자면 나는 고전적인 의미의 뮌헨의 경계에 살고 있는 셈이다.

 

토요일마다 공원 근처 주차장에는 벼룩시장이 선다. 벼룩시장에 가기 위해, 혹은 공원에서 한 바퀴 뜀박질하기 위해 순환 도로 위로 설치된 다리를 건너갈 때마다 나는 범상치 않은 느낌을 받는다. 차원이 전환되는 그런 멋진 건 아니어도 일단은 무언가 넘어가고 있다는 기분이 팍팍 드니까. 비슷하게 달리기를 하면서 한강 다리를 건너가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땐 의도치 않게 경계를 넘긴 느낌을 너무 받아버렸다. 건너편에 다다를 즈음에 날벌레들이 잔뜩 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입을 꼭 닫고 몸을 숙인채 질주해서 돌파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여기에는 벌레가 잘 보이지 않는다. 여름에도 날씨가 한국처럼 덥고 습하지 않아서겠지만 정말 이상할 정도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도 내 문가에 사는 거미는 매일 거미줄을 새로 치는 걸 보면 뭔가 먹고 살만한 게 있나보다.

 

지난번에 갔을 때보다 조금 일찍 갔음에도 불구하고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벼룩시장은 조금 초라한 모습이었다. 벼룩시장이라고 해서 정말 순수한 개인들이 와서 물건을 파는 경우는 잘 없고 대개 이민자 같은 사람들이 잡동사니를 잔뜩 싣고 와서 판다. 황량한 주차장에 있는 반쯤 버려진 물건들. 벼룩시장에서 팔리는 물건은 아직 어떤 식으로든 쓰일 수 있어서겠지만 주인에게는 더 이상 쓸모가 닿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게다가 잘은 몰라도 독일이 아닌 어느 곳의 억양이 묻어나는 독일어에서 나는 물건들의 출신지를 상상해본다. 정말 세계 어디에서라도 올 수 있는 것들이었다. 영국풍 사기 접시, 살찐 러시아 할머니들이나 입을 만한 스웨터,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손목시계, 그러나 물건의 종류는 생각보다 제한되어 있다. 벼룩시장을 돌다보면 결국 다들 비슷한 물건을 팔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하기야 그러니까 벼룩시장에 있는 것이겠지만.

 

중고품을 사는 게 사회적으로는 참 좋은 일이긴 해도 그곳에서 물건을 유심히 쳐다보게 되는 내가 씁쓸하게 느껴졌다. 여기는 말하자면 패자부활전 같은 곳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집시 같은 사람들이 골동품 잡동사니를 늘어놓고, 역시 그런 물건을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와서 뒤적거리다 가끔씩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하는 곳이다. 오늘날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세계의 끝이 있다면 이런 곳 아닐까? 열악한 노동현장, 빈곤한 삶은 자본주의에게 있어서 추악한 세계의 일부이지 그걸 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대신에 어떻게든 흘러들어온 물건들이 다시 한 번 팔려보려고 애를 쓰고 있는 뮌헨 경계의 주차장 정도면 꽤나 쿨한 세계의 끝이다. 그곳이 그들의 마지막 딛고 있는 땅이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건 이 정도다. 세계의 끝이라는 말을 쓰면서 김연수를 언급하지 않는 건 너무나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그의 소설을 이야기하겠다. 그의 소설에 나오는 세계의 끝은 호수가 있는 공원의 메타세쿼이아 나무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게 그 정도였다는 소리다. 그러고 보면 서울에 살던 시절 내 세계의 끝은 어디였는지 조금 궁금해진다. 어느 순간에는 세계의 끝을 알고 있었던 것 같지만 끝내 잊어버리고 말았으니 말이다. 대신 여기서는 내가 있는 곳이 바로 세계의 끝임을 알고 있다. “최전선이 곧 마지노선인 것처럼 내가 태어나서 가장 멀리 온 곳이므로 여기가 나의 끝이다. 몇 해 전에 좋아했던 말, 백척간두 진일보는 빙빙 돌아서 독일에 있는 나에게 다시 돌아왔다. 여기서 나는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처음부터? 끝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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