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정기 연재/'타인의 얼굴' by 작희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은총> 3

김작희 2013. 11. 23. 13:13

(계속)


찬 바람 한 줄기가 휭하니 스쳐갔다. 노파는 일어서서, 엽서들을 각각의 칸 속에 더 단단히 밀어넣기 시작했다. 그녀의 외투는 벨루어 원단으로 된 것으로, 허리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밤색 치마는 뒷부분보다 앞부분이 더 높이 추켜 올라가 있었고, 그래서 그녀는 걸음을 뗄 때마다 마치 배를 앞으로 한껏 내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녀의 작고 둥근 모자에 저항 없이 순순히 구겨져 부드러운 주름이 잡혀 있는 것과, 즈크 직의 끈 묶는 구두를 눈여겨보았다. 노파는 바지런히 가판대를 다시 정돈하는 중이었다. 그녀가 읽던 책은 (그것은 베를린 여행 소책자인 것으로 밝혀졌다) 의자 위에 놓여 있었는데, 가을바람이 무심히 페이지를 잔뜩 넘겨, 안에 차곡차곡 접혀 있던 지도를 계단처럼 펴 내려뜨려 놓았다.

나는 슬슬 추위를 느꼈다. 담배가 비스듬하고 씁쓸하게 그을어 갔다. 모종의 불친절한 한기가 파도져 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노파를 찾아오는 손님은 없었다.

그 사이 노점 노파는 다시 자신의 횃대로 돌아갔는데, 그 등받이 없는 의자가 그녀의 키에 비해 너무 높았기에 그녀는 그 위에 올라앉기 위해 그 투박한 구두의 밑창을 차례로 보도블럭에서 치켜올리며 몸을 비틀어야 했다. 나는 담배를 땅에 버렸고, 들고 있던 지팡이의 끝으로 꽁초를 탁 튕겨내어 분무기처럼 작은 불꽃들이 뿜어져 나오도록 했다.

족히 한 시간, 어쩌면 그 이상이 이미 지났을 터였다. 나는 왜 네가 올 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새 하늘은 시나브로, 한 덩이 거대한 먹장구름이 되어 있었고, 행인들은 몸을 잔뜩 굽히고는 모자를 붙든 채 빠른 걸음을 더욱 재촉했으며, 광장을 지나던 여자 하나는 우산을 펴 들었다. 지금 네가 도착한다면 그건 그야말로 기적일 것이었다.

노파는 조심스레 책갈피로 읽던 곳을 표시해두고는 생각에 잠긴 듯 독서를 잠시 멈추었다. 내 추측으로는, 그녀는 아마도 아들론 호텔에 투숙하는 어떤 부자 관광객이 나타나 그녀의 물건들을 몽땅 사들이고, 물건값보다도 훨씬 많은 돈을 지불하고, 추가로 더 많은 그림엽서와 온갖 가이드북을 주문해 주는, 그런 류의 상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 역시 그 벨루어 외투를 입고는 그다지 따뜻하지 못할 것이었다. 너는 오기로 약속까지 했는데도. 나는 너와의 전화 통화를 기억했고, 네 목소리의 무상한 그림자도 기억했다. 그 순간 얼마나 네가 보고 싶었는지. 그놈의 바람이 다시 몰아쳤다. 나는 옷깃을 돋우어 세웠다.

그 때 갑자기 보초소의 창문이 열렸고, 녹색 옷을 입은 헌병 하나가 그 노파를 불렀다. 그녀는 재빨리 의자에서 기어내려가, 잔뜩 내민 듯한 배를 움직이며 허둥지둥 창구로 바싹 다가갔다. 헌병은 여유 있는 손놀림으로 그녀에게 가장자리가 살짝 넘친 잔 하나를 건네고는 창문의 미닫이를 내렸다. 그리고 그의 녹색 어깨는 창 너머에서 돌아서 뿌연 심연 속으로 사라졌다.

잔을 신중히 받쳐든 채로 노파는 자리로 돌아왔다. 잔 가장자리에 찰랑이는 액체의 갈색 가장자리를 보니 그것은 아마도 우유 넣은 커피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그 누구도 그렇게 집중하여, 온전하고 심오한 즐거움으로 무언가를 마시는 광경을 본 일이 없었다. 노점도, 차디찬 바람도, 그토록 고대하던 부자 미국인 손님도 잊은 듯, 그녀는 그저 마시고 빨아들이며, 커피 안으로 완전히 잠겨들었고, 그 몰입에 나 역시 기다림의 촉각을 완전히 망각하고는 그녀의 벨루어 외투와, 행복감으로 젖어든 두 눈과, 잔을 움켜쥔 모직 벙어리장갑 속의 굵고 통통한 손만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녀는 경외감으로 우유거품을 핥고 따뜻한 양철 잔에 손바닥을 녹이며 천천히 한 모금 한 모금, 오래도록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내 마음에도 진하고 따뜻한 온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내 영혼 역시도 따뜻한 것을 마시며 몸을 녹이고 있었고, 노파가 커피를 마시는 모습은 우유를 탄 커피와도 같은 맛이었다.

그녀가 커피를 다 마신 모양이었다. 한 순간 그녀는 꼼짝 않고 가만히 멈추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몸을 일으켜, 잔을 돌려주러 창구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반쯤 가다가 멈추어 섰고, 그녀의 입가에 미동과 함께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노점으로 서둘러 돌아가 천연색 엽서 두 장을 집어들었고, 창구로 다시 재빨리 돌아와서는 털장갑에 싸인 작은 주먹으로 창문의 유리를 톡톡 두드렸다. 창살이 열리고 커프스에 반짝이는 단추가 달린 녹색 소매 하나가 그 안에서 미끄러지듯 나왔고, 그녀는 여러 차례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잔과 엽서들을 캄캄한 창구 안으로 밀어넣었다. 헌병은 엽서를 들여다보며 몸을 돌려 그의 뒤로 미닫이창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