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배설>/노랑가방

'그림자와 이별하기'의 일부

노랑 가방 2013. 9. 20. 23:24

K가 불쑥 말했다.

 

영국에 살았었다.

어릴 때?

어. 영국은 비가 자주 오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그냥 방에 있었어.

 

여기까지 말하고 K는 오랫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그 애의 콧등이 찌푸려졌다가 펴졌다가, 또 주름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가만히 걸었다. K의 새치가 가로등 밑을 지날 때마다 반짝거렸다. 영국에 살던 시절에도 K에게 새치가 있었을까. 왠지 그랬을 것 같았다. 영국 골방에서 비오는 날마다 외로워하는, 새치가 난 꼬마 K를 상상해보았다. 웃음이 났다.

 

왜 웃냐.

어렸을 때도 새치가 있었어?

그럴 리가 없잖아. 어릴 때의 나는 그냥 어린 나로 봐줘라.

 

그렇게 말하면서 K도 웃었다.

 

영국에서는 비틀즈를 들었어. 또 블러라던가, 아무튼 여러 밴드 음악을 들었다.

지금도 좋아하잖아.

그 때 만들어진 취향이야. 그 때는 음악 듣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으니까. 오롯이 혼자 남겨져서 나는 주욱, 외로웠다.

 

외.로.웠.다. K는 그 말을 한 글자씩 되새김질했다. 나도 따라서 그 말을 우물거렸다. 외롭다는 말을 모르지 않는데도 K의 외로움은 어쩐지 아주 낯선 것처럼 느껴졌다. 우물거릴 수록 그 말은 더 흐릿해졌다. 꼭 내가 그 말을 먹어버리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각자 외롭다는 말을 먹어 삼켰다. 모든 말을 먹어버리고 첫 글자, 그러니까 '외'의 초성 정도만 남아있겠다 싶을 때쯤 K는 다시 말했다.

 

난 아주 어렸고 영어도 못했으니까, 내가 그 곳에서 할 수 있었던 건 얼마 없었다. 그냥 앉아서 음악을 자꾸 자꾸 들었어. 고모 집에서 고모 가족과 함께 있었지만, 고모 가족은 자주 집을 비웠어. 어린 내가 어디로 나가기라도 할까봐 방문을 밖에서 잠그고 나갔다. 그러니까 정말 내가 할 수 있었던 일이 몇 없었지. 비는 자꾸 내리고, 빗소리는 외롭고, 그걸 피하려고 나는 음악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거야.

어느 날 아침이었어. 아침인데도 비 때문에 하늘이 흐려서 저녁처럼 어둡던 날이었어. 침대 등 때문에 생긴 그림자가, 어슴푸레하게 벽에 드리워졌지. 나는 그림자를 보면서 음악을 들었다. 그 날의 기억은 엄청나게 또렷해. 그림자는 흐릿했지만 분명 그 자리에 있었어. 나와 함께 비틀즈의 노래를 들으면서, 오래 오래 그 자리에 있었어. 그 때의 나는 렛잇비, 렛잇비 하는 가사가 웃기다고 생각했어. 가사 속의 비가 한국어 단어인 것처럼 들렸다. 그것이 비가 되게 해. 그것이 비로 남도록 내버려둬. 나는 제멋대로 노래를 해석하며 그런 시덥잖은 생각 속에서 몸을 뒤척거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어. 렛잇비 같은 건 이미 지나간 지 오래였지. 비도 그친 상태였고, 곧 있으면 하늘이 맑아질 것 같았어. 하지만 그림자는 지나가지 않았다. 내가 지나가지 않으면 그림자도 지나갈 수 없으니까 그건 당연해. 원래 그림자라는 건 그런 거잖아. 나한테 매여있는 것.

그런데 문득, 정말 이상하게도, 어느 순간 그림자가 지워지기 시작했다.

 

K는 거기까지 말하고 나를 보았다. 우리는 독서실 입구에 이미 도착해 있었지만, 나는 입을 벌린 채 K의 말을 경청 중이었다. K의 말은 허무맹랑했다. 판타지 영화에나 나올 법한, K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진작에 무시해버렸을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말을 한 것은 K였다. K는 허튼 말을 하지 않았다.

K는 좀 더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진짜야. 설명할 수 없지만, 정말이야.

계속 이야기해 봐.

그림자는 허리께에서부터 천천히 지워졌다. 어쩌면 발끝부터 지워졌을 수도 있겠지만, 그 부분은 이불 그림자와 겹쳐져서 지워졌는지 어쨌는지 알 수가 없었어. 아무튼 허리부터 흔들리며 사라지던 그림자는 마침내 머리 부분까지도 완전히 없어졌다. 나는 있었어. 나는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림자만이 사라진거야.

어떤 기분이었니.

내가 사라진 기분이었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K를 한 번 보고, 그의 그림자를 한 번 보았다. 그의 길고 강마른 그림자는 우리를 비웃듯 멀쩡하게 땅 위에 붙어있었다.

 

그림자를 다시 되찾은 것은, 사촌 형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형이 방문을 열었을 때, 형을 돌아보고 나서 다시 벽을 봤더니 거기에 그림자는 돌아와있었다. 형은 여느 때처럼 명랑하게 이불을 걷고 나를 방 밖으로 데리고 나왔어. 그리고 나는 그 일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정말로 내 그림자가 도망가버릴 것 같았어.

그런데 나한테는 이 이야기를 해주고 있잖아.

너랑 있을 때, 내 그림자는 네 그림자 옆에 있어. 그게 왠지 안심이 된다.

 

K의 그림자가 내 그림자 쪽으로 한 발자국 가까워졌다. K는 편안한 표정이었다. 이야기를 꺼내놓고 나니 홀가분한 것일까. 나는 불쑥, K에게 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애의 팔을 잡자 두 그림자가 하나처럼 포개졌다. K는 놀란 눈을 하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도 너에게 할 말이 있어.

 

나는 조금 망설였다. K는 짧은 침묵을 기다려주었다.

 

나도 너와 비슷한 경험이 있어.

뭔데?

나는, 내 그림자가, 사람들과 섞여있을 때, 분명 나는 사람들과 같이 있다 생각했는데, 그림자를 내려다보면, 그 그림자가, 혼자, 조금 뒤로 물러나서…….

 

나는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K가 그러했듯이, 나 역시 처음으로 해보는 이야기였다. 힘들지는 않았지만 뭐라 말을 끝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K는 흐릿해진 말끝을 캐묻지 않았다. 대신에 내게 잡힌 팔을 들어, 내 한쪽 어깨에 손을 올렸다. K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K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나도 아무 말 없이 그 애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K의 단단한 뼈를 만지면서, 또 K는 내 좁은 어깨를 만지면서 우리 둘은 그림자를 포개놓았다. 새들이 부리를 비비듯, 개들이 서로의 품을 찾듯.

독서실에서 나오는 몇몇 지친 얼굴들이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여름의 후덥지근한 바람이 우리 주위로 오래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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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글의 형태로 내놓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마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릴 것이고 또 어쩌면 영영 끝나지 않을 일일 것 같아 일부분만 떼어 먼저 적는다.

쓰면서 자꾸 그림자를 소재로 한 다른 소설 하나가 겹쳐 떠올랐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 소설을 읽기 훨씬 전부터 나는 그림자 얘기를 하고 싶었다. 닮아보인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사실 닮아보이고 싶어 애쓰는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