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배설>/심연

릴레이 소설1을 처음으로 이어씀

nanunsaram 2014. 1. 13. 01:43

안경이 예뻤다. 차마 안경을 쓰든 안 쓰든 예쁘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옹졸하게 안경이 예쁘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기껏 청첩장을 보내준 전 여자친구에게 여행을 같이 가자는 말은 이 나이 먹고 할 말이 아니었다. 우리는 운명처럼 만나서 우연에 의해 헤어지곤 한다. 그게 껍데기뿐인 상상에 불과할 지라도 최소한 성현이 정아를 만나기까지는 수도 없이 많은 조건이 충족되어야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정아를 소개해 준 P선배는 정아와 같은 극회에 소속되어 있었다. 평소 말수가 적은 데다가 과방에 들어오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에 성현의 동기들은 그를 많이 어려워했다. 과방에 왔을 때 마침 그가 와서 어색하게 앉아 있으면 뜬금없는 질문을 툭툭 던지고는 몇 마디 나누다가 휙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절대로 쿨하다거나 하는 타입은 아니었는데도, 그러니까 형광등으로 치면 푸른빛보다는 주황빛에 가까운 색을 내는 사람이었는데도 어쩐지 그에게는 말을 걸기가 쉽지 않았다.

굼벵이가 어느 나무인가를 기어오르고 있었을 초여름이었다. 성현은 간만에 아무런 약속도 없이 느릿느릿 교정을 걸었다. 가고 싶은 곳도, 갈 수 있는 곳도 딱히 없는 걸음걸이였다. 자취방에 돌아가면 무거운 공기가 한숨쉬듯 그를 맞아줄 것이 뻔했으므로 차라리 누군가가 있는 교정이 나았다. 학생회관을 돌아가자 웬 목조구조물 같은 것이 세워지고 있었는데, 설치하는 사람들이 인부라고 하기엔 너무 제각각이었으므로 여느 동아리의 학생들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중에 커다란 천조각 같은 것을 만지작거리는 P선배의 옆모습이 보였지만 딱히 일부러 인사를 할 사이는 아닌 것 같아 빨리 걸어 지나가려고 하던 차였다.

"어이, 성현이 안녕."

목소리는 컸는데도 억양은 보통 목소리로 말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성현은 고개만 측면으로 한 채 대답했다.

"P형, 안녕하세요. 이게 뭐에요?"

P선배는 늘 말을 편하게 하라고 종용했지만 성현을 포함한 동기들 중에 P선배에게 말을 놓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배는 그 점을 놓치지 않고 대답했다.

"내가 말 놓으랬지. 아, 나 연극 동아리하는데 무대 설치 중이다. 이번에 노천연극제가 있거든."

P선배와 연극동아리라니 도저히 묶어서 생각하기 어려운 조합이었다. 어쩐지 항상 가면을 쓴 것 같이 불편한 느낌이었는데 과연 연기를 잘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웠다. 어떤 역할을 맡아도 평소에 쓰던 말투가 나올 것 같은 타입 같았다. 성현이 우물쭈물하고 있자 P선배가 다시 말을 꺼냈다.

"나는 연기는 안 하고 스탭이야. 연극 동아리래도 생각보다 배우 이외에 필요한 게 아주 많거든."

성현이 역시 그러면 그렇지 하는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P선배는 대뜸 번호교환이라도 하자며 휴대폰을 꺼냈다.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휴대폰고리가 걸려 있었다. 번호교환을 할 때마다 머쓱한 느낌이 들어서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왠지 P선배와 번호교환을 하니 한 걸음 내딛은 기분이 들었다. 대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 인정받았다는, 망상에 가까운 도취감이었다.

"선배 이건 어디에 두면 돼요?"

저쪽에서 조그만 상자를 열던 여학생이 P선배에게 소리쳐 물었다. 어쩐지 부족해 보이는 화장, 아마도 대학에 온 뒤로 끼기 시작했을 렌즈가 상상되는 얼굴은 성현과 같은 신입생으로 보였는데도 목소리가 강단있어서 놀라웠다. 

"그거 그냥 거기 둬. 내가 처리할게."

P선배는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대꾸하고서 성현한테 속삭이듯 말했다.

"쟤도 신입생인데 잘은 몰라도 성격 장난 아닌거 같더라. 암튼 다음에 우리 공연하면 보러 와라. 언제 시간 되면 커피라도 한 잔 하고. 밥 한 번 먹자면 왠지 빈 말 같잖아. 커피는 정말 마시자구."

괜히 얼떨떨하게 고백이라도 받은 느낌으로 서 있다가 성현은 허둥지둥 대답과 인사를 겸해 꾸벅 절하고서 계속 걷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다리가 갑자기 남의 것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낮 동안 달구어졌던 공기가 바람을 타고 콧속으로 들어왔다. 그때 맡은 무엇이라 형언할 수 없는 냄새가, 성현이 정아와의 첫 만남을 생각할 때마다 떠올랐다.


지금 눈 앞에 있는 정아는, 그때의 그 여학생이 아니었다. 항상 힘이 들어간 목소리는 여전했지만 정작 눈가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살짝 처진 채였다. 그리고 성현은 문득 자신이 내뱉은 말에 진정 책임을 져야 하는 순간이 왔다고 생각했다. 무슨 대답이든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으로 눈을 살짝 감았다가 뜨며 다시 정아를 바라 보았다. 정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다시 주저앉아 성현을 뚫어지듯 쳐다보았다. 지금이 정아를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는 마지막일 수도 있었기에 굳이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이윽고 정아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대답한다면, 안 돼. 하지만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