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배설>/심연

승리의 방식

nanunsaram 2014. 1. 7. 18:35

나는 돌아서 가는 게 좋다.


목적지가 있는 여행은 편리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목적지에 도달하고, 또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는 것을 반복하다보면 처음 출발한 장소로 돌아오게 된다. 여기서 이동하는 과정은 중요하지만, 그저 수단에 불과한 느낌이다. 오히려 목적지에서 느끼는 감상과 그곳에서 겪는 사건들에 심취해 있기 때문에 이동은 보조적인 시간, 심지어 무용한 것으로까지 느껴지곤 한다. 시간을 절약한다는 이유로 야간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일이 그러하다. 물론 정지된 숙소에서도 잘 수 있고 기차에서도 잘 수 있다면, 기차를 택하는 일이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서 야간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버려지는 시간이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했다는 건 목적지 중심적인 사고다.


사실 여행에 대해 쓰고 싶지는 않았지만, 여행만큼 삶을 밀접하게 보여주는 비유는 없을 것이기에 굳이 여행 이야기를 더 해보겠다. 목적지가 없는 여행이 성립가능하긴 한가? 애초에 자신이 일상을 보내지 않는 다른 어딘가에서 다르게 흐르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여행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동 자체를 초점에 둔다면 이번엔 목적지가 보조적인 수단이 되어버린다. 한 곳에 정박해버린 여행자는 더 이상 여행자라고 부르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면, 여행자는 마땅히 계속 흘러다녀야 하고 그 흘러다님에 여행의 본질이 있다. 목적지들이 물론 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특정한 목적지를 선택할 수 있겠지만 이런 극단적인 가정은 생각해보자. 말 그대로 순간이동기계가 개발되어서, 원하는 목적지를 바로 바로 옮겨다닐 수 있게 된다. 이 때도 여전히 여행이란 게 가능할 것인가. 뮌헨에 오는 사람들이 보고자 하는 것들, 이를테면 신시청사, 올림픽공원, BMW박물관, 독일박물관 같은 것들을 중간 과정 없이 바로 튀어다니며 볼 수 있다면 그 사람들은 여행을 한다는 느낌을 받기 어려울 것이다.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TV로 바로 보는 것처럼(독일어로 TV는 Fernseher, 즉 직역하면 멀리 있는 것을 보는 것이란 뜻이다) 대단히 한가로운 일이 될 가능성이 크다. 시청각적 이미지를 소파에 처박힌 채 링거를 맞듯 공급받는 것처럼, 장소들의 분위기를 느끼는 <멋진 신세계>의 촉각영화와 다를 바 없다.


그리하여 여행에서 이동이 빠진다면 과연 여행이라고 부를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는 아니오로 대답하도록 하자. 이제 본격적으로 하려던, 승패에 관한 한가로운 이야기를 해보자. 대학에 와서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어쨌거나 삶은 계속되긴 하지만, 고등학교 때의 길이 몇 갈래 나뉘지 않았다면 대학에서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다.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 스타일의 길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마땅히 있다. 한편 반에이 경마(http://ko.wikipedia.org/wiki/%EB%B0%98%EC%97%90%EC%9D%B4_%EA%B2%BD%EB%A7%88)처럼 무거운 짐을 끌고 지구력까지를 테스트하는 길도 있다. 자유롭게 초원을 달리는 쪽을 선택하기도 한다. 어느 쪽도 잘못된 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여행과 견주어 보면 경주마의 삶이 이동을 경시하는 스타일의 여행과 가까워보이고, 발 가는 대로 세계를 걷고 뛰고 타고 다니는 사람들은 방위조차 불분명한 지평선을 향해 달리는 셈이다. 어느 쪽이든 소위 목적지에는 도달할 수 있으나, 전체로서의 여행/삶이 주는 인상은 판이하게 다르다.


목적지가 없는 여행이 주는 매력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전혀 예상치 못한 것들을 만난다는 점이다. 물론 유명한 목적지들을 만나기도 하겠지만 보통 정해진 길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질문들과 마주칠 수 있는 건 오로지 길을 벗어났을 때뿐이다. 금방 목적지에 가면 무엇인가 많이 거두었다는 성취감을 얻을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지도에서 다녀온 장소를 점을 찍어 표시한다고 해서 아름다운 별자리를 그릴 순 없다. 더욱 중요한 건 그 점들이 어떻게 연결되느냐다. 손쉽게 직선으로 그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밤하늘을 보고 상상한 수많은 이야기들은 길에서 적당히 벗어나 자유로운 형상을 그리는 선에 기반하고 있다.


때때로 길을 벗어나면 비난을 듣기도 하고, 죽을 수도 있다는 엄중한 경고와 마주치기도 한다. 위험을 자초하는 건 옳지 않으나, 미리 규정된 위험을 놀이기구 타듯이 즐기는 것보다는 예상된 범위 내에 있지만 어떤 형태로 다가올 지 모를 위험을 즐기는 것 정도라면 누구라도 도전해 봄직하다. 그래서 나는 멀리 가려면 돌아서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일단은 패배하더라도 재미있게 패배한다면 결국은 승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중요한 것은 한 장소에 지나치게 오래 머물러서 자신이 어느 방향에서 왔고 어느 방향으로 가는 지를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승리의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