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미정(2)
강남역에 있다고 하길래 기대하고 찾아간 학원의 내부는 놀라울 만큼 허름했다. 석유난로라도 때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의 교실에는 대여섯 명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를 나라의 말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이 정도나 된다는 것이 남자는 신기했다. 무엇보다 더 신기한 건 그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며 가르치는 선생이 있다는 것이었지만. 곧 그 나라에 파견될 회사원과 어릴 때 그 나라에 잠시 살았지만 다시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고등학생, 여러 언어에 관심이 많다는 아주머니. 전부 그럴 듯한 이유이면서도 왜 하필 그 나라냐는 질문에는 다들 웃어넘길 뿐이었다. 상부의 지시라거나, 어릴 때의 경험, 언어 자체에 대한 흥미는 굳이 그 나라가 아니더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었다. 한편 자주 그의 회화 연습 상대가 되곤 했던 여자는 그 나라 쪽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라고 했다. 인접 국가의 언어를 이미 할 줄 알던 터라 여자는 금세 문장을 만들어서 말하곤 했다. 남자에게 가장 헷갈리는 부분은 남성형과 여성형을 구분하는 것이었다. 단어에 성이 있어서 남성, 여성을 구분해야 하는 게 아니라 남성화자와 여성화자가 쓰는 문법체계와 어휘가 다른 언어에서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큰 차이를 보였다. 자기의 성별에 맞춰서 공부를 한다면 말할 때는 편하지만 다른 성별이 하는 이야기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원어민들이야 아무런 어려움 없이 쓸 것을, 크기만 클 뿐 초등학교 책걸상을 빼닮은 책걸상이 놓인 강의실에서는 이성 간에 오해 아닌 오해가 벌어졌다. 강사는 일부러 그래서 다른 성별끼리 짝을 지워 연습하는 것이라고 했다. 낯선 문자가 날카로운 선을 잃고, 귀에 설은 발음이 부드러워질 때까지 여러 개월이 걸렸다. 그러면서 남자는 이 언어의 좋은 점을 한 가지 알게 되었다. 여성화자의 말을 듣고 있으면 상대가 여성이라는 걸 너무도 강력하게 계속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학원에서의 한 학기가 끝나고 회화 파트너였던 여자에게 그 나라 음식이라도 같이 먹으러 가자고 제안한 건 당연한 결과였다.
이태원 골목에 있던 음식점 간판은 학원보다 더욱 낡은 느낌을 주었다. 촌스러운 이름부터가 조금 불안했는데, 냄새 나는 계단을 걸어 올라가 음식점에 들어가니 깨끗하게 닦이다 못해 반짝거리는 탁자들이 오히려 의심스러웠다. 아무래도 그 나라 사람들이 아니고서야 잘 오지 않는 음식점이었기 때문에 카운터 뒤에 서 있던 주인은 느릿느릿 걸어와 메뉴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들이 꽤나 유창한 말로 주문을 하자 반색을 하며 괜히 맥주 한 병씩을 서비스로 내주었다. 딱히 반주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공짜를 마다할 이유는 없었으므로 남자와 여자는 잔을 쨍하고 부딪쳤다.
여자는 구술사를 전공하고 있다고 했다. 구술사가 무엇인지 정확히 몰랐던 남자는 오디오북으로 된 역사책 같은 것이냐고 물었다.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렸다는 대답에 남자는 조금 실망했지만 곧 요리가 나왔으므로 대화는 잠깐 끊어졌다. 겉으로는 냄새가 잘 나지 않았지만 입에 넣는 순간 오미를 자극하는 독특한 향이 퍼지는 찌개 같은 것을 한 입 물고 남자는 살짝 찡그렸다. 처음에는 누구나 다 그런 법이겠지만, 이라며 여자는 한 숟가락 크게 떠서 눈을 감고 음미하듯 삼켰다. 남자는 그래서 구술사가 무엇이냐고 물어봤다.
구술사가 무엇인지 대답해주는 대신에 여자는 대학교에 들어왔을 때 했던 배낭여행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반짝거리는 탁자 끄트머리에 희미하게 테두리만 남은 국물 자국이 왠지 여자가 하는 이야기에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어떻게 방송을 잡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벽에 걸린 TV에서는 그 나라 말로 된 뉴스가 나왔다. 때로는 소리를 흘려보내듯이, 때로는 꽉꽉 목구멍을 막으려는 것처럼 쉴 새 없이 말하는 앵커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여자의 목소리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