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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면 연애처럼 사라질 아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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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would you rather, 게임 제 3문항:

당신 스스로가 홀든 콜필드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래요, 아니면 아직도 홀든 콜필드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과 결혼할래요?


아마도 완벽주의자는 더 미련[未練]에 취약한 것이 아닌가 한다.

미련이라는 말은 채 다 익히고 훈련되지 못했다는 뜻이니, 아마 미완의 모든 것에는 -- 통상 말하는, 해결되지 못한 연정 같은 것과는 전혀 딴판의 의미로 -- 미련이 남을 것이다.

미련과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은 그래서 아무래도 이루지 못한 꿈일 것이다.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었던, 유산된 꿈들에 대한 멜랑콜리아.


이제는 접고 닫고 묶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지저분하고 질척한 것들 -- 세상의 끝 어딘가에서 혹 이루어졌을지도 모르는 꿈들을 -- 하나씩 꺼내어 보기로 한다. 꾿빠이, 뮤즈, 미래를 향한 부도수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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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나는 동안 우리는 꿈만을 무성히 키워 냈다.

꿈이라는 것이 대개 그렇듯, 우리가 그리고 상상한 모든 아름다운 일은 그 시공간적 배경이 흐릿하다고 보아도 좋다. 나는 늘 해바라기가 지평선 아래로 땅을 가득 채운 것을 보고 싶어했고 --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은 사실 해바라기일지도 모른다 -- "누나가 튤립 좋아한다고 안 했으면, 아마 해바라기라고 생각했을 걸요, 그냥 잘 어울리니까," 라고 말했던 어느 후배의 말처럼 -- 우리는 그래서 언젠가, 지구 어느 곳엔가는 분명 존재할, 해바라기밭에 가 보자고 마음을 먹었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린넨 소재의 여름옷 -- 피천득 씨라면 필연 저고리, 라고 말했을 것인데 -- 을 입고 해바라기밭을 보는 것을 가끔 생각해 본다. 다만 방 한 곳에 해바라기 대여섯 송이를 꽂은 꽃병을 놓아두는 일 또한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 해바라기 꽃잎을 잘근잘근 씹어 놓을 내 고양이는 이런 일들을 알지 못한다.

그 또한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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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우리는 아마도, 늘 어디론가 여행을 가고 싶었을 것이다.

나를 만나러 오는 일련의 과정이 너에게는 여행이었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우리는 결국 어디로도 여행한 적이 없다.

그것은 아마도 내 책임일 것이다.


딱히 미안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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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스스로를 -- 아이러니한 자찬의 의미로 -- 스놉[snob]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 스노버리[snobbery]가 어떤 식으로 표출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팝 음악 대신 좋은 음악을 듣는, 그런 문화적 취향 같은 의미의 이야기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소문난 피자를 찾아 먹고, 소문난 냉면을 먹고, 소문난 만두집에서 소문난 만두와 칼국수를 먹었었다.

당시의 우리는 아마도 -- 그것밖에는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기도 했고, 그것만 함께 해도 즐겁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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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집을 짓고 가구를 들이고 고양이와 아이를 키우는 꿈도 꾸었다.

집은 이렇게저렇게 했으면 좋겠노라고 그가 여러 가지를 말했던 것이 생각나는데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는 한옥을 짓고 그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 또한 했었던 것 같다.

아이를 낳으면 2개 언어를 가르치고, 여러 종교의 사원에 데리고 다녀 스스로 선택하게 하자던 이상한 이야기들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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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았다.

그렇게 비겁하고 저열해져 가면서까지 붙들고 있을 필요가 하등 없었을 -- 인생을 배우고 싶어 책으로 인생의 이런저런 의미만 어렴풋이 주워 섬긴 십 대의 연애.


아주 고별해도 좋을 것이다.

더는 괴로워하는 일도 스스로에게 금지할 생각이다. 어차피 비웃음만 살 괴로움이라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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