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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면 연애처럼 사라질 아득한

요리책 한 권을 사 들고 돌아오는 것


054. 두릅과 미나리 소테, 파트 필로로 싸서 구운.

산나물은 튀김으로 먹어도 맛이 좋다.
치즈의 유지방을 더하고 얇은 파트 필로로 싸서 구워, 기름과의 궁합을 살렸다.

재료 (7cm짜리 세르클틀 7개 분량)

두릅, 20개
미나리 (듬성듬성 썬 것), 1단 분량
건포도, 2큰술
카망베르치즈, 1개 (약 100g)
민트, 1팩
파트 필로, 가로세로 15cm * 21장
올리브오일, 적당량
소금, 후추, 적당량씩

1. 두릅은 받침을 잘라내고 씻는다.
2. 올리브오일을 조금 두르고 1과 미나리를 볶은 다음,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해서 식힌다.
3. 볼에 2와 건포도, 손으로 찢은 카망베르치즈, 민트를 넣어 버무린 다음, 소금, 후추로 간을 해서 냉장고에 넣고 식힌다.
4. 틀에 가로세로 15cm 크기로 자른 파트 필로를 3장씩 겹쳐서 깔고, 3을 1큰술씩 올려서 싼다. 위에서 올리브오일을 조금씩 뿌리고, 200'C 오븐에서 10분 동안 굽는다.


침부터 시답잖은 일로 어머니와 목소리를 높인 끝에 현관문을 나서고야 만다.

정말 시답잖은 일이라면 이렇게까지 마음이 불편하지도 않을 것이니, 결국에는 어머니 말이 맞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복으로 비행기를 탄 것처럼 속이 뒤틀리고 쓰라린 우울함이다.

요일 오후에 써 두고 잠이 들어 부치지 못한 연하장 봉투를 가방에 챙겨 나왔다. 거리에 눈발이 날린다. 지퍼 한 쪽이 말을 듣지 않아 미국에 두고 온 눈 장화가 아쉽다. 연하장을 부치고 나서는 싸구려 부츠라도 한 켤레 사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지갑이 얄팍하다.

우편물 무게가 많이 나가지 않기를 바란다. 

이것 역시 -- 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방에 든 봉투들을 아예 부치지 않을 생각도 한다.

지난 한 해 동안 너를 여러 차례 초대해 주신 -- 추수감사절 만찬에까지 -- C의 부모님과 조부모님께 성탄 선물까지는 아니어도 신년 인사라도 보내는 것이 예의에 맞겠다는 생각에 예쁜 연하장을 찾아 부치기로 마음 먹은 것인데, 정작 너의 할머니 할아버지를 뵌 것이 -- 최근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더더욱 -- 몇 번 되지 않는다는 것, 편지를 써 본 적은 평생 한 손에 꼽을 수 있다는 것 -- 을 생각했을 때 목 안쪽이 막히듯 뜨거워지는, 것. 은. 

. . . 


타지에서 행복하고자 하는 -- 삶의 한쪽이라도 부서진 것을 모아 쌓아올리고 싶다는 -- 욕망조차도 불효이고 불충인 것 같아 뱃속과 머릿속이 통째로 먹먹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너는 연락조차 받지 못했다. 

눈이 녹아 떼가 뭉텅이로 떠내려간 산소 앞 벌건 진흙투성이 땅에 서서 울지도 못하고 물러나왔던 것. 인사 올려라, 평생 고생하셨어요, 하고 -- 라던 어머니 말에 -- 산등성이에 눈부시도록 샛노란 조화 두 다발에 -- 고대 문학의 온갖 애가[哀歌]를 마음속으로 떠올렸던 것. 5개월이나 벌써 되었지, 하고 언덕길을 돌아 내려가며 아버지는 오히려 얼굴에 시름이 없었던 것. 프로이트의 "애도와 멜랑콜리아"를 떠올린 것. 아무도 네 죄를 물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해도, 그저.

오히려 메스껍도록 싫은 것은 -- 양심의 가책을 다른 행복으로 채울 마음, 다들 그렇게 사는 거지, 하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할 마음조차 먹기를 꺼릴 만큼, 네가 교만하고 위선적이라는 것. 

행복과 봄을 싫어하는 이들은 사치스런 사람들이라던 피천득 씨의 말을 기억한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도 아마 그런 것일 테다. 쉬운 행복, 쉬운 위로를 천시하지 않는 겸손한 마음. 행복을 행복으로 감사히 아는 마음. 죄 사함을 진심으로 믿고 기뻐하는 마음.

이렇게 몸과 마음과 날씨가 모두 숨을 틀어막듯 무거운 날에도 너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되지 못한다. 

이번 생은 글렀어 -- 정확히 옮기자면 "글렸어" -- 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전 애인을 생각한다. 

싸구려 옷이라도 잔뜩 사면 기분이 풀릴 것 같다는 생각에 지하상가로 내려가 스웨터며 모자 같은 것을 구경한다. 서점에서 좋아하던 시인의 시를 읽어 보아도 오늘따라 -- 포스트모더니즘의 경박함이, 질척함이, 서정시의 순진해 빠진 것만 같은 인류애가 -- 지면[紙面]으로부터 활자마다 무의미의 향연이다. 

이런 날조차도 마음이 가난하지 않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따지고만 싶은 일이다. 


C와 주말 내내 크게 싸우고 난 11월 말의 어느 월요일 저녁에 너는 C에게 전화를 걸어 이별 선언을 했었다. 네 마음을 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니, 라고 묻던 C는 택시를 타고 네 집까지 와서 너를 조곤조곤 달래어 놓고 돌아갔다. 

나는 너랑 앞으로 평생 살 생각에 굉장히 행복했는데, 너랑 헤어지고 나면 아주 오랫동안 아무도 못 만날 것 같아, 라는 말이 아프고 괘씸했다.

바로 그래서 헤어지고 싶은 거야, 지금보다 나중이 힘들 텐데, 난 뭐라도 좋고 행복한 것이 없어지지 않고 계속 여기 있을 거라는 걸 도무지 못 믿겠어, 라는 말이 미처 다 정리가 되지 않아 나온 네 대답은 -- 너랑 헤어지면 너무 슬플 것 같아서 헤어지고 싶어, 였다. C는 그 말을 듣고 헛웃음을 웃었다. 지금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이유인지 너도 알지.

나랑 헤어져도 너는 나보다 괜찮을 거잖아, 뒤돌아보지 않고 제쳐 뒀던 삶의 폐허 같은 건 없잖아, 누군가와 평생 살고 싶다는 말이 쉽게 나오는 네가 얄미워, 라는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 나는 배배 꼬인 사람이라서 앞으로 평생 이럴 거야. 나보고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나는 내가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안 믿는 사람이라서, 우리가 아무리 행복해도 나는 내가 행복할 수 없는 이유를 상상해 내서 너까지 힘들게 할 거야. 

- 있잖아, 재키. 나는 삶이 행복하다는 말 사실 안 믿어. 삶은 그냥 살아지는 거고, 그 중에서 행복한 순간이 있고 안 행복한 순간간이 있는 건데, 나는 너랑 있을 때는 -- 아까 굉장히 슬픈 상태로 네 얼굴을 봤을 때를 제외하면 -- 안 행복했던 적이 없는 것 같아. 내년도, 내후년도, 그 다음 해도, 또 그 다음 해도, 그렇게 몇 년을 너랑 보내도 좋을 거야. 

- 그럼 그렇게 되지 않으면 어떻게 해. 

- 그건 모르지. 누구랑 그렇게 오래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해 본 게 처음이라서. 진짜로 몰라.

- 내가 이사를 가야 하면 어떻게 해.

- 네가 여기 있고 싶은데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 거라면 우리가 결혼하면 되는 거고, 다른 곳으로 이사하고 싶은 거라면 내가 이사를 갈게. 그 대신 러시아로 가면 안 돼, 나는 러시아어를 못 하니까.




요동치지 않는 삶, 차분히 어제와 내일이 다르지 않은 리듬으로 영속되는 삶에 대한 믿음이 네게는 없다. 

C의 모든 말이 함정같게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 온전한 신앙을 갖추지 못한 사람만이 종말을 두려워하듯 -- 삶에 가졌던 믿음이 배반당할 순간이 두려워서일 것이다.



--

시선집이 진열된 서가를 떠나 요리책을 구경하러 간다.

전 애인은 마지막으로 네게 요리를 해 주고 싶다고 했었다.

그 회심의 요리가 그렇게 맛이 있지 않았다는 것만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사실 네가 언제나 네가 원했던 건 1인분의 요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었다. 혼자 밥을 먹지 않아도 되는 삶,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삶.

어차피 혼자일 삶이라면 아무렇게나 먹어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 형형색색의 -- 손쉽게 만드는 일본 가정식, 사찰 요리, 유명 중식당 셰프의 레시피 특선 -- 요리책에도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할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뵈었던 날, 힘겹게 식사를 마치고 내놓으신 그릇을 씻었던 것을 생각한다. 제대로 떠나보내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멜랑콜리아는 퇴치할 방법이 영 없다.

그럼에도 채소를 주제로 한 두꺼운 책 한 권을 사 들고 오는 것은 --

서낭당을 지나며 작은 조약돌을 슬며시 올려놓는, 덕수궁 돌담길을 사랑하는 사람과 걷지 않는, 그런 작은 기원 같은 것이다.

행복하게 해 주세요. 아스라지지 않고 떠내려가지 않게 해 주세요. 빼앗아 가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