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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로프의 탄생 - 안암의 의문에 대하여

 

 칼로프의 탄생 

- 안암의 의문에 대하여


안암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선 나 자신이 안암이 아니므로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나는 반오십의 세월 중 상당한 기간을 알고 지냈으며 기억할 만한 추억도 있기에 안암을 좋아하며 존경할 만한 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는 어느 날 안암은 내게 물었다.

여러 의문이 있었지만, 그 중 하나는 이고르 칼로프와 나의 시에 관한 의문이었다.

 

안암은 내가 런던 시절부터 써온 연작시 <잘린 머리 송가>의 존재를 알고 있으며, 나 자신이 그 작품으로 어떤 문학상 본선에까지 올랐지만 탈락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안암의 의문은 다음과 같다: 내가 올린 이고르 칼로프에 관한 글은 내가 썼던 시들의 폐허로 구성되어있다. 이는 결국 문학상을 수상하지 못한 도피의 결과물이 아닌가?

 

그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지만, 조금 더 길게 정리해볼 필요를 느꼈으므로 구질구질하게 이 글을 쓰기 시작한다.

 

우선 이고르 칼로프의 탄생에 관해서 설명을 해야 할 듯싶다.

 

칼로프는 확실히 나의 3년의 런던 생활 동안 탄생한 인물인 것은 맞다. 그러나 그 탄생은 <잘린 머리 송가>와 동시에 이루어졌다.

 

본래 나는 가상의 작가나 인물을 즐겨 사용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태도에 크나큰 변화를 가져온 인물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페르난두 페소아일 거다.

런던 생활 초기에 도서관에서 우연히 그를 읽게 된 이후로 나는 가상의 인물들에 대한 나의 태도를 크게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페르난두 페소아는 익히 알려진 것처럼 자신이 아닌, 수많은 타인으로서 글쓰기를 지향했던 작가이고, 그를 통하여 에 대해 고민을 했던 작가다.

 

내가 페소아처럼 그러한 깊은 고민과 위대한 시도를 한다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적어도 나는 이러한 방법을 어설프게나마 모방할 필요성을 느꼈고, 조금씩 시행해나갔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이고르 칼로프다.

 

물론 작가가 있기 이전에 작품의 씨앗이 먼저 있었다.

 

워털루 다리 밑을 지나가던 도중 난 문득 다리를 올려다보며 다리의 모양이 단두대의 그것과 닮았다고 느꼈고, 거기에서부터 <떠가는 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러하듯 그 과정이 순탄하진 않았다. 학교까지 걸으며, 혹은 런던 책방까지 걸어가며 구상을 해도 더 이상 진전이 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가 칼로프가 탄생했다.

 

처음부터 그의 이름이 있진 않았다. 처음엔 막연하게 런던의 망명자, 혹은 내가 아닌 어떤 유학생의 입장에서 써내려간 시란 생각으로 구상이 시작되었고, 그 후의 과정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그는 런던 이곳저곳을 방랑하고, 미술관의 그림 앞에서 한참을 서있기도 하며 영원히 이방인으로 남는다.

 

나의 최종적인 구상은, 이 연작시를 완성한 직후, 그 시인은 자살을 했고, 내가 우연히 그 시집을 의역을 했다는 설정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그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이 과정에선 상당한 게으름이 개입했음을 순순히 인정하겠다.

 

본래 나는 ‘JHALOFF’란 어떤 이름을 하나 사용했는데, ‘J’는 나의 이니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처음 만들 당시 의도한 것이니 당연하겠지만) 나는 그 이니셜을 나의 또 다른 이름을 구성하는 이니셜 ‘K’로 대체했다. ‘K’는 더욱이 카프카의 K를 연상시키므로 더더욱 효과적이었다. 그렇게 하여 칼로프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 단계, 즉 연작시집이 완성된 단계에서까지 칼로프가 부여받은 것은 이 시를 썼다는 설정과 이름뿐이었다. 더욱이 내가 번역한 그의 시에선 한국을 모를 칼로프의 입장에선 쓸 수 없는 구절들도 있기에 말 그대로 허울뿐인 설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거기서 그쳤다면, 칼로프는 좀 더 오랫동안 묻혔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난 군대를 갔고, 군대의 기묘한 환경 덕분에 이런저런 글들을 쓸 수 있었는데, 그 중엔 나의 또 다른 자전적 인물이 조역으로 등장하는 시리즈도 있었다. 그 이야기가 내 생각보다 점점 커지면서 나는 가상의 작가와 작품을 도입할 필요성을 느꼈는데, 공교롭게도 이미 나에겐 칼로프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칼로프를 그대로 쓰기엔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그에게 있는 것은 이름과 외국인인 그가 썼다고 하기엔 석연치 않은 이상한 번역본뿐이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상당한 작가들 쓰는 꼼수를 선택했다. 한 작품의 판본이 하나여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마치 말로우의 파우스투스가 조금 다른 두 판본이 있듯, 칼로프의 잘린 머리 연작도 내가 번역한 판본과 칼로프의 원본, 이렇게 두 판본을 두면 될 일이다.

 

그리하여 나의 취향과 그 시리즈의 성향을 위하여 칼로프의 생애는 구체화되었고, 그의 원본이 탄생하였다.

 

이고르 칼로프에 관한 짧은 글은 그 시리즈의 일부이자 소개를 위한 가공에 가깝다. 그 시리즈의 초고를 완성한 직후, 나는 처음부터 다시 써야함을 깨달았지만, 아직까지 그 작업을 시작되지 않았으니까.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이고르 칼로프는 온전히 새 시리즈에 속하지도, 그렇다고 기존에 썼던 연작시에 머물지도 못하게 되었으니 칼로프에겐 유감이다.


그렇다면 새롭게 탄생된 칼로프에게 한계는 없었는가? 그리고 그 한계를 내가 한 번이라도 생각을 못했는가? 그에 대하여 모든 의문에 대한 확답을 줄 순 없어도,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취향에 손을 들어주었고, 차라리 내적으로 그 한계를 다루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물론 이런 방식이 여전히 한계를 없애주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다. 정말로 한계를 없애려고 했다면, 아예 문제 자체를 지워버리는 쪽을 택했을 테니까.


그러나 이는 나 자신의 한계이자, 부도덕하고 혐오스런 방식을 넣으려는 나의 취향의 한계일 것이며 한 실패한 이의 음울한 도피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므로 안암에 대한 나의 답은 다음과 같다.

이고르 칼로프와 나의 실패한 연작시의 관계에 대하여: 모순적이지만, 도피이지만, 도피가 아니다.

 

소재의 재활용 및 재가공이라는 점에선 도피일지도 모르고, 아마도 도피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본질적으로 문학이란 어느 정도 도피 아래에서 형성된다고 믿기 때문에, 이 과정을 도피라고 칭하는 것은 문학의 성질을 어느 정도 부정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렇기에 도피는 아니다. (문학에 관한 나의 생각에 대해선 언젠가 또 다시 쓸 일이 분명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안암의 의문에서부터 시작된 글이지만, 이 글이 안암의 의문에 대한 직접적인 해답이 되지 않을 거란 건 잘 알고 있다. 어떤 의미론 안암의 의문에서 촉발되어 내 어떤 생각을 읊조린 것에 불과하니까.

안암 앞으로 썼지만, 사실 안암이 읽지 않아도 무방할 것이다. 아마 안암도 그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이 과연 진실이나 옳은 해석을 담은 것인가? 그에 대해선 난 부정하겠다. 본래 글을 쓰는 자들이란 그런 법이다. 읽는 자에게 믿게 하고 싶은 무언가를 진실처럼 포장하는 것은 나의 영역이지만, 그걸 받아들일지, 아니면 내가 어떤 속임수를 쓰고 있는 게 아닐지 의심하는 것은 읽는 자의 영역이다. 난 그걸 존중한다.

 

다만, 칼로프는 이미 죽은 자지만, 그의 새로운 글이 수십 년 후에 발견될지, 아니면 탄생될지는 누구도 모른다.

 

 

안암에게 안암이 원한, 멸망 직전에 모두가 춤추는 글의 진전은 예상보다 느리지만, 언젠가는 의뢰를 완수할 수 있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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