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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연애 이야기/비가 그치듯 모든 게 괜찮아질 거야

어느 밤 -- 타협과 샤워와 누드



- 작년 이맘때는 내 기분이 날씨에 그렇게 크게 영향을 받는 줄 몰랐어.

- 캘리포니아엔 날씨가 없어서?

- 2월, 3월엔 우울해서 죽는 줄 알았는데, 왜 그런지도 모르겠고 진짜 힘든 거 있지. 근데 4월이 되니까 바보같이 종일 실실 웃고 다녔었지.

- 글쎄, 4월엔 아마 다른 누군가의 영향이 있었던 것도 같고.

- 세상에.

- 왜 때려?

- 좋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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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가 남자친구와 헤어졌단다.

현재 비행기로 한 시간 반 정도 떨어진 도시에 사는 남자친구 -- 그를 일단 H라고 부르기로 하자 -- 오는 가을에 T와 네가 사는 도시로 이사를 오기로 되어 있었다. 오는 가을, 이라고 하는 것도 T가 몇 차례의 유예를 준 끝에 -- "작년 이맘 때는 가을에 온다고 하더니, 가을이 막상 되니까 지금 직장에서 일 년 단위를 꽉 채우고 올해 2월쯤 온다잖아. 올해 2월이 되고 내가 가을에 집 뺄 생각까지 다 하고 있었는데 이게 뭐야. 끝이지 뭐. 더 생각할 것도 없어." -- 결정된 기한이었으나, 변화나 도전을 무서워하는 편인 남자친구가 대뜸 선언을 해 버린 것이다. 나 이사 못 해. 미안하지만 이사는 진짜로 못 하겠어.

전후 사정을 들은 C는 -- "목요일에 한 번 더 얘기는 해 보기로 했다는데, T 생각엔 거의 가망이 없는 것 같대." -- 글쎄, 난 그래도 아직 50퍼센트 정도는 H가 맘을 바꿀 것 같은데, 하고 중얼거린다.

- 그렇지 않아? T랑 헤어지기 싫어서라도 아마 그렇게 할 거야.

- 꼭 이번 이사가 힘들어서, 만은 아니야. T가 졸업을 하면 또 이사를 가야 할 거고, 그 때마다 여자친구 커리어를 따라서 옮겨다닐 걱정도 되는 거겠지.

- 음, 그래도 난 가망이 있다고 생각해.

너는 입을 다문다.


너는 다시 여름 석 달을 다른 대륙에서 보낼 생각이다. 여자친구의 4분의 3이라고 C에게 농을 걸었더니, 나쁘지 않은 분수[fraction]지만, 역시 좀 슬프지, 하는 답이 돌아왔다. 슬픈 일이구나, 라고 너는 생각한다. 지구 반대편에서 건너온 사람을 좋아하는 것도, 지구 반대편으로 건너다니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도 C에게는 -- 젓가락으로 국수 집기조차 힘들어하는 -- 익숙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

- 만약 내가 모스크바나 하얼빈 같은 곳에서 일 년을 산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야.

- 글쎄, 생각 안 해 봤어. 일단 엄청 보고 싶겠지?

일 년의 장거리연애는 아마, 플라토닉한 관계를 믿지 않는 C에게는 타협점 바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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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것도 타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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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연애도 타협이 된다는 것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다만 타협이 아닌 연애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너는 점차로 생각하게 된다. 이상적인 연애라는 것도 결국은 타협을 타협으로 인정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그래서 C는, 너의 주기적 뉴로시스와 싸이코시스와 방랑벽을 견뎌 가며 -- 너는 C의 워커홀릭과 눈치 없음과 수많은 '여자 사람 친구'들을 견뎌 가며 -- 여행을 떠나고, 찬거리를 사다가 저녁을 해 먹고, 의자에 노트북을 놓고 소파에 누워 몸을 포갠 채 영화를 본다.

결국 이상에 수렴해 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한계라면 -- 그것이 아니면, 물질의 불완전한 몸 어딘가에 이상적 형태가 그래도 깃들어 있는 것이라면 -- 세상에 존재하는 행복 중 가장 행복의 이상에 가까운 형태를 이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상적 타협일 것이며, 그 타협의 균형점이 서로 맞지 않을 때가 이별이 되는 것일 테다.


C와 나란히 식탁에 앉아 여행 계획을 짜고 나니 밤 열 시 반이다. 과제를 하러 집에 가야 한다던 C는 -- "맘 같아선 지금 당장 네 옷을 벗겨 버리고 싶은데, 지금 안 가면 과제 할 시간이 안 날 것 같아." -- 라이드 셰어링 앱의 요금 상황을 보고는 한 시간쯤 기다리는 게 좋겠단다.

그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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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젖은 C의 살갗이 매끈거린다.

- 수영은 언제부터 했댔지.

- 시합 나가고, 그런 것 말야?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였는데, 그래서 좀 버거웠지. 보통 진짜 선수 커리어를 생각하는 애들은 대여섯 살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거든.

- 가을에 날씨가 좋으면 세일링 보트 태워 줄 거야? 나 수영 못 해서 빠지면 건져 주기도 해야 해.

- 일부러 빠지게 해서 수영도 가르쳐 줄게. 

- 물, 더럽댔는데.

너는 클림트의 나체들을 -- 서로의 유선형 굴곡을 감싼 채 사지를 포개고 엮은 -- 떠올린다. 푸코는 섹스 -- making love -- 야말로 육체의 밀밀한 실존을명히 확인하게 하는 기적이라고 말했었다. '사랑' 후의 몽롱한 포옹과 대화까지도 '사랑'의 연장선이라면 아마도 성교 자체보다는 그 후반부가 더 기적에 가까울 것이다. 지친 몸으로 존재하는 시간, 지친 몸으로 존재하는 상대와 자신의, 몸으로서의 무게를 감지하는 시간.


언젠가, 욕조 속에서 서로를 끌어안은, 영화 속 한 남녀를 보고, 저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라고 글을 쓴 적이 있다. 아마 지금 이 공간도 -- 그러니까, 마주 닿은 C와 네 피부 사이에, 그 피부를 윤활하는 물의 막[膜]과 표면장력 속에, 165파운드와 97파운드 사이의 인력, 작용과 반작용의 공식 속에 -- 존재하는 그 무엇도 -- 도피처가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수도꼭지를 잠가 물줄기가 멎는 순간 형체도 없이 흩어질, 지극히 사적인 낙원. 알리바바의 동굴처럼, 시공간을 찢듯 아주 짧은 순간, 천장에 물곰팡이 자국이 스미는 좁은 욕실에 -- -- "기왕 다 젖은 거, 그냥 머리를 감을래. 마르는 데 오래 걸리니까." "아, 이제 실시간으로 보네." "뭘?" "I always wondered, what does she do to look so beautiful every single day. 뭘 어떻게 하는지 봐야지." "말이나 못 하면." -- 돋아나는 기묘한 황금빛 헤테로토피아.

그런 순간들만큼은, 시간의 흐름 밖에 있다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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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하게도 -- 푸코의 에세이는 죽음과 사랑을 결부시키는 것으로 끝난다. 에이즈로 죽었다고 알려진 사상가는 말년, 사랑을 나눌 때마다 환희와 죽음을 나란히 맛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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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사랑은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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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은교'를 읽지 않았다. 언젠가 노년이 찾아오면 다른 몸의 촉감에서 젊음을 찾게도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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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의 밥그릇을 채워 주고 나서 너는 블라인드를 내린 네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는다.

일곱 시 반부터 일어나 바지런히 움직인 탓에 몸이 피곤하다. 스웨터와 트레이닝 팬츠를 그대로 입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자 C가 잠결에 -- "몇 시야." "아홉." "음." -- 네 이마에 입을 맞춘다.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나니 C는 이미 네게 팔을 빌려준 채로 천장을 망하니 올려다보고 있다. 반듯한 이마며 입매가 아침 햇빛에 예쁘다. 베이비페이스의 남자만 좋아한다며 너를 놀리던 친구들의 말을 곱씹어 본다.

곁에서 눈을 뜨면 언제라도 어느 침대에서라도 네 쇄골과 장골 -- 치골은 잘못된 표현이다 -- 에 입을 맞춰 줄 애인이 있다는 것, 오븐에서 파이가 구워지는 그 짧은 막간의 순간에도 서로의 요철을 탐하는 촉박함과 다급함 반의 여유로움, 샤워를 하루쯤 거른다 해도 크게 상관은 없을, 체모와 치모의 말단까지도 향기롭고 단단한 몸, 같은 것들이 -- 지금 네게는 젊음의 정의일 것이다.

노년이 되어서는 이런 일상의 몸짓들이 그리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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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ruego me permita hacer borrón y cuenta nueva. La edad no tiene realidad, salvo en el mundo físico. La esencia de un ser humano se resiste al paso del tiempo. Nuestras vidas son eternas, lo que significa que nuestros espíritus siguen siendo tan juveniles y vigorosos como cuando estábamos en plenitud. Piense en el amor como un estado de gracia, no el medio para nada, sino el alfa y el omega."